황희정 기자 2024-09-13
지구법, 모든 자연적 실체에 권리와 자격이 있다
지구법은 21세기 초 제안된 법과 거버넌스의 전환 이론이자 법철학이다. 미국의 문명사상가이자 생태신학자인 토마스 베리(Thomas Berry)가 2001년 ‘지구법(Earth Jurisprudence)’ 개념을 제창했다. 베리는 저서 『위대한 과업』에서 현재의 법체계는 인간과 지구의 관계를 다룰 수 없다는 점에서 결함이 있다고 지적한다. 지구법은 근대의 인간 중심적 법체계가 지금의 생태위기를 심화시켰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베리는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자연적 실체도 지구 공동체 역할을 실현할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봤다. 그가 말하는 기본 권리는 “자연 체계 안에서 구성 요소들이 자신들의 기능과 역할을 실현할 수 있는 서식지와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그는 2001년 회의에서 ‘지구법학의 열 가지 원리’를 발표했다. 그중 핵심 요소는 ‘존재할 권리’, ‘서식할 권리’, ‘지구의 진화에 참가할 권리’로, 이 세 개의 명제는 전 세계의 ‘자연의 권리론’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인류세(Anthropocene)에서 생태대(Ecozoic Era)로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인류세는 현재의 지질학적 시대, 인간의 활동이 기후와 환경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간주되는 시대로 정의되어 있다. 인간 문명이 지금의 생태위기와 기후위기를 초래함을 의미한다. 토마스 베리는 이러한 신생대(인류세)를 넘어 생태대로 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유일하게 지속가능한 미래로 가는 경로임을 밝혔다. 생태대는 ‘인간이 상호 증진적으로 지구에 거주하는 통합적 생명 공동체 시대’를 말한다. 생태대의 문명 거버넌스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지구 중심주의로 가야 하며, 지구법(학)이라는 철학적 원리가 그 기초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지구법에서는 보호받고 권리를 누리는 주체가 인간만이 아닌 지구 전체 생명으로 확대되고 인간 공동체는 지구 공동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지구법적 패러다임 전환의 선례
지구법에서 인간은 지배자가 아닌 ‘대변자’이고, 인간 중심주의자에서 ‘지구 중심주의자’로 변모한다. 국가의 안보에서 지구의 안보로 넓어지고 민주주의에서 생명주의, 국가연합에서 종의연합으로, 세계평화에서 지구평화로 그 주체와 목표가 확장된다. 이런 시점은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한다. 전 세계 곳곳에서는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시도가 보이고 있다. 지구법의 선례로 1972년 시에라클럽 사건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의 윌리엄 O. 더글러스 대법관이 주장한 소수의견이 꼽히고 있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법학과 교수 크리스토퍼 스톤이 ‘나무도 원고적격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의견서를 제출했고, 더글러스 대법관은 자연물이 원고적격을 가지며 환경단체도 자연물의 법적 후견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스톤 교수는 자연물도 후견인이나 보호자 또는 수탁자를 지정해 행위할 수 있고,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이익을 가지며 그 침해를 우리가 인식할 수 있고, 자연물을 원상태로 회복하는 데 드는 비용을 청구할 수 있다는 법적 권리 인정 요건을 충족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토마스 베리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자연의 권리를 인정한 사례들
세계적으로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사례는 헌법, 법률, 판결, 조례, 정책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2008년 에콰도르의 헌법 개정은 세계 최초로 헌법전에 자연의 권리 조항을 둔 사례가 되었다. 헌법 제7장에 자연이 단순히 인간의 소유물이 아닌 법적 권리를 가진 주체임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에콰도르 원주민의 생명·생태 중심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매우 혁신적인 조치로 다른 국가들에서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법적, 윤리적 논의를 촉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인도에서는 2017년 3월 1일 우타라칸드주 고등법원에서 갠지스강과 야무나강의 법정 권리를 인정했다. 우타라칸드주 고등법원은 히말라야 빙하에도 법인격을 인정했으며 강고트리와 야무노트리 빙하를 포함한 빙하, 강, 시내, 개울, 호수, 대기, 초원, 계곡, 밀림, 산림 습지, 초지, 샘 및 폭포도 법인의 지위를 갖는 법적 실체라고 판시했다. 볼리비아, 멕시코, 뉴질랜드,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벨리즈, 브라질, 코스타리카 등에서도 이와 같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지구법은 지구를 위한 권리장전
지구법은 자연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인간법에 수용하자고 제안하는 법철학이다. 박태현 강원대 로스쿨 교수는 “지구법은 특별한 개별법을 만들자는 것이 아닌, 접근법으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현재의 인간 중심적인 법이 변하지 않으면 기후위기를 해결하기는 요원한 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정혜진 변호사는 “기후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 위에 서 있는 지금, 지구는 새로운 법이 필요하며 지구법은 지구를 위한 권리장전”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지구 생명 공동체적 사고로의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으로 보인다. 인류의 지속가능성은 지구의 지속가능성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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