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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권의 동아시아 종과 횡 | 근대의 번역에서 노벨문학상까지

 

근대 일본의 번역과 문학작품을 통해 동서양 문화의 교류와 갈등을 살펴보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한강이 보편적인 문학세계를 열고 있음을 말한다.

2024-12-26 송병권


송병권 상지대학교 교수는 2011년 일본 토쿄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미일 관계를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7년간 편사연구사로 일했고, 다음 7년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와 한국사연구소,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2020년에 상지대학교에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근현대 동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지역주의, 지정학, 경제사, 정치사상, 국제관계사를 주로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현대 동아시아 지역주의: 한미일 관계를 중심으로』(2021), 『동아시아, 인식과 역사적 실재: 전시기에 대한 조명』(공편저, 2014), 『근대 한국의 소수와 외부, 정치성의 역사』(공저, 2017) 등이 있고, 번역서로 『일본 근대는 무엇인가』(공역, 2020), 『GHQ: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2011) 등이 있다.


 

여러분은 너바나(Nirvana)를 아실런지 모르겠다. 1987년에 결성된 미국의 록밴드를 떠올린다면 록 음악에 일가견이 있음을 인정드린다. 하지만 이 록밴드가 주제는 아니다. 너바나는 불교의 열반(涅槃)을 가리키는데, 사실은 영어 표기의 너바나든 열반이든 팔리어인 निब्बान나 산스크리트어인 निर्वाण를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바나에 대한 가장 큰 충격은 도올 김용옥의 글 속에서 읽었던 격의불교(格義佛敎)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너바나는 번뇌가 소멸된 상태 또는 완성된 깨달음의 세계를 의미하는 불교 핵심 교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중시하는 현실적인 실천윤리에 익숙했던 당시 고대 중국인들이 곧바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웠다고 한다. 이에 중국인들은 그나마 가장 익숙한 무위(無爲)라는 도가사상의 개념을 빌려와, 무위라는 번역을 통해 너바나를 이해하게 되었고, 이후 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도가 충분히 깊어진 이후에는 너바나의 발음 그대로 열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컴퓨터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위해 처음에는 전자계산기라는 번역을 한참 사용하다가, 10년도 지나기 전에 컴퓨터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게 된 경험을 생각한다면, 이것이 더 쉬운 사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런 이야기는 근대 일본을 공부하면서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번역과 일본의 근대’라는 개념과 조우하면서 다시 되새기게 되었다. 서양 근대의 새로운 개념을 번역하는 사투 속에서 근대의 새로운 가능성과 확장성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동아시아의 근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타자를 바라보는 자아의 태도를 고민하게 된다.

근대를 만들어 낸 서양에 대해 동양은 과연 뒤떨어진 존재인가? 혹은 서양과는 다른 세계인가? 두 개의 세계가 만날 때 서양은 동양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확보했는가? 근대 초기 동아시아에서는 동양사회에 대한 논의 속에서 서양 근대에 뒤처진 동양사회가 열심히 이들을 뒤좇아 가려는 근대화 담론이 주도했다. 서양의 오리엔탈리즘 속에서 객체화되고 대상화된 동양은 서구화 혹은 근대화를 통해 서양에 흡수되어야 할 존재가 되었다. 이를 통해 동양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근대 일본에서는 영어상용론은 물론 서양인과 인종교배를 통해 육체적으로도 서양인이 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논의까지 등장했을까.


근대의 물결이 지구를 뒤덮는 과정에서 다른 흐름도 등장했다. 롤모델로서 서양을 일정 정도 객관화할 수 있게 되면서, 서양 근대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번역할 수 없는 동양에 대한 인식이 등장한 것이다. 서양 근대에 대한 저항으로 번역할 수 없는 동양의 특수성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졌다. 일본의 미의식이라든지, 서양을 뛰어넘었던 근세의 중국 문화에 대한 재조명과 같은 분위기는 한국에서도 동일한 수순을 밟았다. 정체를 상징하던 동양사회론은 서양사회와 동양사회가 각각 독자적 근대를 향했고, 그것이 현대를 구성한다는 병행적 사고도 등장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한국학에서도 도저히 번역할 수 없는 한국만의 미의식, 생활양식, 사고양식 등과 같은 자의식에 충만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196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카와바타 야스나리. 사진_노벨 재단 아카이브

동양사회라는 고민은 노벨 문학상 수상 강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196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美しい日本の私)라는 제목으로 자국어인 일본어로 강연을 했다. 노벨 재단에서 찾아 읽을 수 있는 카와바타의 글은, 일본어라면 나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필자로서도 너무도 불편하고 어려운 문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강연문을 읽으며, 별도로 첨부된 영문 번역문과 대조하면서, 번역가가 겪었을 극심한 고통을 상상해 보았다. 이것은 마치 일본인이 아닌 타자들에게 번역의 불가능성을 카와바타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서양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번역할 수 없는 다른 세상이 있다고 말이다. 이것은 마친 서양사회와 병행해서 존재하는 동양사회의 존재에 대한 관심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199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에 켄자부로. 사진_노벨 재단 아카이브

또 한 명의 일본인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켄자부로(大江健三郎)의 강연은 카와바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의 강연 제목을 확실히 의식한 ‘애매한 일본의 나’(あいまいな日本の私)이다. 수상 연설문을 번역된 영어로 강연한 오에는, 서구와의 관계성을 중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카와바타가 이야기한 일본의 미의식은 막연하면서 불명료하고 애매한 것(vague)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애매함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진 양의적인 애매함(ambiguous)으로 오에는 정의했다. 그는 그 ‘애매함’이 일본의 개국 이래 백여 년간 지속된 근대화 과정 속에서 양극단으로 분열되어 그 어느 쪽으로도 결정되지 않는 것이고, 일본이 서양 근대로 달려가면서 동양사회와 맺은 관계성 속에서 일으킨 불행한 역사적 과거를 성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이것은 서양 근대를 추수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자국의 근대화로 고통을 겪은 아시아라는 과거를 성찰해야 한다는 논의와 연결된다.


2024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 사진_노벨프라이스 아웃리치

카와바타나 오에는 그 방향성은 다르지만, 동일하게 ‘일본’이라는 공간을 중심에 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즉, ‘일본’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을 넘어서는 것, 즉 번역하기 불가능하거나 번역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이들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비록 12.3 내란 사태의 충격 때문에, 그 빛이 조금은 바랜 감이 있지만, 한강 작가의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은 여전히 그리고 충분히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을 유튜브로 들으면서, 그녀의 작고 낮은 목소리 하나하나가 내 귀에 꽂히는 경험은 온라인 강의의 지루함을 너무나도 잘 아는 필자에게는 적지 않은 신선함을 안겨줬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물론 한국어로 처음 듣는 노벨 문학상 수상연설문이어서도 있지만, 오히려 그 이유는 메시지에 있었다. 한강은 한국적 정서나 한국적 미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광주나 제주는 한국적이라기보다 지구 곳곳에서 발생한 인간의 슬프고도 고단한 그럼에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보편적인 정서의 표현에 다름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비극성에 대한 공감을 온몸으로 써 내려간 한강의 작품 세계는 이미 한국적인 그 무엇을 넘어선 것이었고, 그것은 번역이 불가능하거나 번역하기 어려운 그 무엇을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번역의 근대로 다시 돌아가서, 번역 그 자체는 설령 번안이나 오역이라 할지라도 번역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닐까? 한강의 문학은 번역 불가능성 혹은 번역의 어려움에 집중하기보다는 번역의 어려움 속에서도 형성되는 보편적 공감의 정서를 번역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오히려 드러내 주었다. 한국어도 쓰였건, 영어로 쓰였건, 혹은 그 어느 언어로 쓰였건, 그것이 지구인의 언어로 쓰여졌다면, 그 문학은 공감할 수 있는 세계성을 획득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한강의 소설이 너무나도 시적인 언어로 쓰여져서 번역이 어렵다는 이야기보다는 그녀의 소설이 가진 공감의 정서가 ‘한국’이라는 근대적 특수성을 넘어서 이미 그 자체로 ‘세계’ 문학으로 출발한 것을 축하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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