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현직 대통령의 탄핵이 정국의 초점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법이 우선인지 힘이 우선인지, 법과 힘이 부딪힐 때 '권력을 향한 정당의 집착'이 독재로 갈지, 민주주의로 갈지를 역사와 논쟁으로 살핀다.
2024-12-13 송병권
송병권 상지대학교 교수는 2011년 일본 토쿄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미일 관계를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7년간 편사연구사로 일했고, 다음 7년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와 한국사연구소,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2020년에 상지대학교에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근현대 동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지역주의, 지정학, 경제사, 정치사상, 국제관계사를 주로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현대 동아시아 지역주의: 한미일 관계를 중심으로』(2021), 『동아시아, 인식과 역사적 실재: 전시기에 대한 조명』(공편저, 2014), 『근대 한국의 소수와 외부, 정치성의 역사』(공저, 2017) 등이 있고, 번역서로 『일본 근대는 무엇인가』(공역, 2020), 『GHQ: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2011) 등이 있다.
현직 대통령 윤석열은 '법과 힘의 관계'를 알고 있을까?
그날 밤 늦은 시각 한국의 정치는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 납득하기에도 민망한 이유를 들어 현직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었다. 이는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긴박했던 순간에 국회의사당에 속속 의원들이 집결했고, 두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계엄군이 국회 경내에 진입했다. 일부 병력은 유리창을 깨고 국회 본관이 진입하기까지 했다. 이런 긴박한 순간 속에 월담까지 하며 국회로 달려간 국회의원들은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안을 상정하였고 재석의원 전원 찬성으로 가결시켰다. 이에 따라 계엄군 철수가 이루어졌고, 불과 여섯 시간 만에 비상계엄을 해제되었다. 이러한 긴박한 와중에 집권여당 소속 의원 상당수는 국회가 아닌 다른 곳에 집결함으로써 재적의원 정족수 확보를 기다려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후 대통령 탄핵과 퇴진을 요구하는 평화 시위 속에서 국회에서는 대통령 탄핵안이 상정되었지만, 세 명을 제외한 여당의 퇴장 전략으로 탄핵안은 투표불성립으로 끝났다. 추가적인 탄핵안 상정이 이번 주말에 예고되어 있다. 이 엄청난 사건에는 많은 시민들이 국회 주변을 중심으로 달려와 의회를 지키려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까지는 모든 분들이 경험했거나, 여러 미디어를 통해 확인했던 내용들일 것이다. 현직 대통령은 계엄도 통치행위의 하나라고 주장하며, 자리에서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는 법과 힘의 관계성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오다카에 따르면, 현직 대통령은 명백히 독재주의에 기울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연구실 서가에 꽂힌 책들을 요리조리 살펴보았고, 법과 힘에 대한 세 권의 책을 발견하였다. 지금으로부터 82년 전인 1942년에 간행된 오다카 토모오의 『실정법질서론』에 실린 〈국가의 법과 힘〉, 77년 전인 1947년에 『고대신문』 창간호에 유진오가 발표한 〈법과 힘〉, 불과 6년 전에 간행된 니시 타이라가 쓴 『법과 힘』이 그것이다.
먼저 오다카에 따르면, 국가는 법과 힘의 종합태라고 할 수 있다. 힘에 입각하지 않은 법은 법으로서 존재할 수 없으며, 힘도 반드시 법에 의존한다고 한다. 하지만, 힘은 법초월적인 목적의 힘을 몰아붙여 법을 움직이고, 법을 넘어서며, 종국에는 법을 파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현직 대통령은 바로 이 부분에서 법을 움직이고, 넘어서며, 파쇄할 수 있는 법에 대한 힘의 우월을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법에 대한 힘의 우월은 독재주의의 원리이며, 민주주의의 원리는 힘에 대한 법의 우월이라는 오다카의 이어지는 문장을 고려한다면, 현직 대통령은 명백히 독재주의에 기울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유진오에 따르면, 비상계엄이 통치행위라는 주장으로 중립적인 법리 다툼으로 가려 하지만…
한편, 유진오의 글은 마치 법에 대한 힘의 우위를 지지하는 듯한 논조를 보여 준다. 1944년 루마니아 국왕이 수상의 친나치 정책에 반대하여 그를 체포한 루마니아 정변을 거론하면서, 입헌군주국의 국왕이 헌법을 위반하여 쿠데타를 감행했지만, 나치의 몰락이란 결과 속에서 국왕의 행동을 아무도 위헌적이라고 비난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법질서는 힘에 의해 타도될 수 있지만, 그 힘은 적나라한 힘이 아니라 새로운 법을 대동한다고 해석했다. 당위와 존재를 준별해야 한다는 신칸트학파의 영향 속에서 규범과 사실의 준별을 부르짖어도 결국 규범은 사실에 의존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직 대통령이 이 글을 혹시 읽었다면 무척 고무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진오는 글의 말미에 이 논리는 하나의 ‘트릭’을 숨겨 두었다고 고백하였는데, 법과 힘으로 대표되는 충돌하는 두 개의 법체계 중 어느 것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며, 이것은 실증법학의 법리를 넘어서는 법률철학의 영역에서 그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현직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통치행위라고 주장하는 것은 중립적인 법리적 다툼의 여지를 남겨 두려는 의도라고 하겠지만, 역시 민주주의의 원리 속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니시에 따르면, 정당들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시민들의 정치적 열망에 반응해야
니시는 유진오도 언급한 한스 켈젠의 당위와 존재의 준별론을 원용하여, 법률은 당위 즉 규범과학에 속하는 것이고, 자연과학, 역사학, 사회학은 존재의 학문에 속하므로, 원칙적으로 힘의 영역은 법률학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언급하였다. 하지만 법질서의 기초가 되는 세력관계의 변동을 무시하여, 정태적인 법규범 체제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귀결로 분쟁을 해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해석도 덧붙인다. 즉 여기서는 법의 영역과 정치 즉 힘의 영역 사이의 갈등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현직 대통령의 비상계엄 시도를 두고 각각의 세력들이 위헌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다투고, 이를 헌법재판소 등에서 법률로 결론을 내는 것은 중요한 절차라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 하지만, 법에 대한 힘의 우위성에 주목한 현직 대통령에 대항하여 오로지 힘에 대한 법의 우위성만을 따져야 한다면, 많은 시민들이 국회를 에워싸며 보호하려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탄핵시위도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의 원리하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정당들은 법에 의해 재판을 하는 결사가 아니라 정치적 결사이고, 이들이 할 일은 헌법재판소의 결정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아 시민들의 정치적 열망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존재일 것이다.
권력을 향한 "정당의 집착", 민주주의를 제도화하기 위한 권력? 독재를 이끌 권력?
역사 속에서 독재를 허용했던 것은 의회주의를 포기한 정당이었다. 민주주의가 공고하지 못할 경우, 이에 대한 권력의 압도는 결국 독재를 가져왔다. 즉, 바이마르 공화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것은 바로 정당들이었다. 권력은 양가적인 측면이 있어서, 민주주의를 제도화하기 위한 권력으로도,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독재를 이끌어 내는 것도 권력으로도 작용하였다. 동아시아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준동을 허용한 것은 권력에 집착한 당시 일본의 정당이었고, 중국의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을 급격히 약화시킨 것은 위안스카이의 황제놀음을 막지 못한 중국의 정치사회였다. 한국에서도 정부수립 이후 많은 대통령의 독재가 가능했던 것도 결국은 권력을 향한 정당들의 집착에도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정당'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다
지금 이 순간 계엄을 허용하려 했던 정당의 움직임은 현재 한국의 정당정치의 위기상황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정당 민주주의 정치의 장점은 대중의 지지를 잃거나 획득한 정당들 간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일 것이다. 이것은 결국 법과 힘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로 되돌아가게 한다. 유진오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그 ‘트릭’ 즉,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이 ‘정당’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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