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시점 미국 주도 동아시아 안보체제는 '한미일 안보협력'
2024-10-31 송병권
송병권 상지대학교 교수는 2011년 일본 토쿄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미일 관계를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7년간 편사연구사로 일했고, 다음 7년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와 한국사연구소,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2020년에 상지대학교에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근현대 동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지역주의, 지정학, 경제사, 정치사상, 국제관계사를 주로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현대 동아시아 지역주의: 한미일 관계를 중심으로』(2021), 『동아시아, 인식과 역사적 실재: 전시기에 대한 조명』(공편저, 2014), 『근대 한국의 소수와 외부, 정치성의 역사』(공저, 2017) 등이 있고, 번역서로 『일본 근대는 무엇인가』(공역, 2020), 『GHQ: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2011) 등이 있다.
낯선 존재? ‘한미일 동맹’
올해 6월에 여당 측에서 내놓은 논평에서 언급된 한미일 동맹이란 표현을 둘러싸고 여야 간에 설전이 있었고, 7월에 들어와 이례적으로 여당 측에서 이를 한미일 안보협력이란 표현으로 수정하고 사과하는 촌극이 있었다. 10월에 들어와서는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열린 시위에서 한미일 동맹 구축을 중단하라는 주장의 가로 현수막이 펼쳐졌다. “아니 이미 한미일 관계는 동맹관계가 아니었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한미일 동맹은 여전히 미국이 구상하는 동아시아 정책에서도 아직 해결되지 못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한미일 동맹은 여전히 낯선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운영하는 빅카인즈에서 한미일 동맹이란 키워드를 가지고 최근 한 달간 신문 자료를 대상으로 검색해 봤다. 한미일 동맹보다는 한미일 협력, 한미일 안보협력, 한미일 3자 협력, 한미일 공조라는 표현이 대부분이었고, 동맹이란 단어를 고집해 검색하면 오히려 한미 동맹이나 미일 동맹이란 표현이 검출된다.
일본과 우호의 강도는, ‘미래지향적 성숙한 동반자 관계’ 정도
심지어는 한국이 한때 적성국으로 간주했던 중국, 러시아, 베트남과 맺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는 표현마저도 일본과는 같이 쓰이지 않는 듯하다.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한국이 다른 나라와 맺은 우호 관계의 강도에서 보면,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에 이어 세 번째로 강력한 관계이다. 그 뒤를 이어서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상호 신뢰하는 포괄적 동반자 관계’가 그다음 순위를 차지한다. 놀랍게도 일본은 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다만 ‘미래지향적 성숙한 동반자 관계’로 표현할 뿐이다.
한미일 관계에 관해서는 연구자들의 세계에서도 한미 동맹이나 미일 동맹과는 달리, 한미일 ‘동맹’이란 표현은 보편적이지 않아 보인다. 예를 들면, 한미일 관계를 다루면서 ‘적대적 제휴’(빅터 D.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 한국석좌)라는 개념이나, 한미일 삼각안보체제(신욱희, 서울대학교 교수)로 개념화하면서도 한미일 동맹이란 표현을 선택하지 않았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봉쇄와 친미 블록 구축
동아시아 지역안보 차원에서 보면 한미일이 북중미에 대항하는 구조는 틀림없어 보이는데, 어째서 한미일 동맹이란 표현이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 지역질서가 형성된 국제관계의 역사를 소급해 봐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먼저,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지역을 두 개의 블록으로 분단시킨 동아시아 냉전을 전후한 역사에 주목해 보려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보다는 동아시아의 안보문제를 국민당 정권이 주도하는 중화민국에 두려 했던 것이 초기 동아시아 정책이었다. 이후 중국이 대륙과 타이완으로 분단되었고, 한반도는 남북한으로 분단되었다. 더하여 한국전쟁이 벌어졌고 동아시아 냉전이 확산되면서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미국의 봉쇄정책, 그리고 재건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친미 블록 구축을 위한 동아시아 정책이 정착되었다.
NATO 모델이 아닌, 부채살 모델
한국전쟁과 함께 주일미군을 한반도에 파병하게 된 미국은 일본의 재군비를 부추겼는데, 연합국의 점령에서 벗어나 ‘독립’을 간신히 이뤄 낸 일본으로서는 초기 대일정책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평화헌법’에 의해 미군을 대체할 군대를 보유할 수 없었다. 이는 미국에 안보를 의탁하면서 경제부흥과 발전에 매진하던 일본 측에서도 헌법을 개정해 군대를 보유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던 측면이 있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병행해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을 통해 미국은 군사력을, 일본은 기지를 제공하는 ‘편무적인’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한국전쟁을 종결하며 한국도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동맹관계를 형성했는데, 여기에는 양국의 군사적 상호 원조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미국은 동아시아 냉전에서 파생한 안보문제라는 공통의 관심 속에서 일본 및 한국 그리고 타이완 등과 같은 친미국가들과 개별적으로 동맹관계를 형성했지만, 일본은 제외한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나 침략으로 상징되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을 포함한 다자간 군사동맹 체제로 이행하는 데 부정적이었던 관계로 마치 유럽의 나토와 같은 기구를 만들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부채살 모델(hub and spoke model)’과 같이 사북을 미국이 맡고 각각의 부채살에 해당하는 개별적인 국가를 제어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일본도 포함시키려 한 미국의 기대와 달리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을 배제한 다자 안보체제를 구상하고 추진하면서,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군사력에 대한, 미국의 통제
다음으로, 한국과 일본, 그리고 타이완 등 새롭게 독립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주권이 미국의 그것에 비교해서 비대칭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미국이 동아시아 국가와 맺은 동맹은 동아시아 냉전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의 침략으로부터 친미국가의 안전보장을 추구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북한 공격 혹은 타이완의 중국 대륙 공격으로 발생할 전쟁 위기의 고조를 통제하거나, 일본의 중국과 소련으로의 접근을 억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과 타이완의 군사력 혹은 일본의 준군사력에 대한 미국의 통제는 아마 일본은 배제하려 했겠지만, 한국과 타이완 등 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이 주체적으로 다자간 지역 단위의 안보동맹을 형성하는 데는 어려움으로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측면에서 살펴볼 때, 현시점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그리고 일본도 참여하는 동아시아의 안보체제는 따라서 한미일 동맹이 아니라 한미일 안보협력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시바 정권이 추구하는 아시아판 나토에 관한 논의도 동일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한미일 동맹이 형성된다고 해도, 동아시아에 평화가 올까?
일본이 한국의 정권은 물론 한국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해 한미일 동맹이 형성된다면 과연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가 찾아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다루지 않은 또 하나의 문제가 남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세계적 냉전의 종언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냉전에서 비롯된 지역 단위의 분단이 일정 정도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한반도의 남북문제, 중국의 양안문제 등 중요한 문제가 여전히 가로놓여 있다. 여기서 파생되는 불완전 주권문제는 여전히 양 지역 간의 안보 위기의 가능성을 농후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북중러 동맹과 대립각을 세울 한미일 동맹의 완성이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이끌어 내기 어렵다는 것은 예상 가능한 일이니 우리들의 고민거리가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다. 이것 또한 한미일 동맹에 회의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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