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 2024-08-15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째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4년 8월 14일의 세계는 그리 안녕하지 않다.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기후위기는 진행 중이며, 해결의 실마리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거의 모두가 묵시록적인 최후를 염려하면서도…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영내로 진입해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만약 러시아가 밀린다면 전술핵무기를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염려를 불러일으키면서도… 중동에선 이란이 보복을 공언한 지 일주일째 장고를 거듭하고 있다. 아마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테네는 산불 앞에 떨고 있고.
그래서 이번 글에서 머리 아픈 현실에 관한 얘기는 빼고 싶었다. 다만, 좀 쉬고 싶고 늦은 휴가를 보내고 싶은 분들께 스릴러소설 몇 권을 추천드린다. 여름이 지나면 좀 나아질까? 세계가 더 이상 발화하지 않길 바란다.)
체제가 어찌하지 못하는 탐욕들
당신은 왜 스릴러소설(혹은 범죄소설)을 읽는가?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첫째도 재미, 둘째도 재미’라고 답하겠다. 이런 종류의 대중문학(순문학과 비교해서) 작품을 읽으면서 감동을 기대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나는 지난 40년간 정말 많은 대중문학류를 읽어 왔다. 탐정소설, 공포와 환상소설, 무협소설, SF소설, 기타 등등. 젊었을 때에는 정말 자극적인, 수수께끼 풀이에 가까운 소설을 탐닉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현실에 기반한 범죄소설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류의 소설 중에서 일급이라 할 작품들은 단지 재미를 넘어서 무언가 강렬한 사회적 파장을 담고 있다. 한 사회가 겪는 아픔들, 모순들, 체제가 어찌하지 못하는 욕망과 탐욕들이 범죄로 나타나고 단죄된다. 우리는 범죄소설을 통해 사회와 인간의 민낯을 본다.
만약 단 한 명의 대중작가, 혹은 단 한 권의 대중소설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과감히 페르 발뢰와 마이 셰발의 이름과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언급할 것이다. 이 시리즈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60년 전인 1965년에 첫 권이 출판되어 10년 후인 1975년에 완간되었다. 페르 발뢰는 완간 전인 1974년에 세상을 떠났고, 마이 셰발은 2020년에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2017년(첫 책을 기준으로 52년만에)부터 2023년까지 총 10권의 작품이 모두 발행되었다.
재미, 사회를 투영하는 강렬한 시선, 세련미
이 작품들이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반문하면, 당연히 첫째는 재미일 것이다. 주인공인 41세의 마르틴 베크 형사(10권째에서는 51세의 경감이다)와 그 동료들은 쉽게 풀리지 않는 사건들을 어떻게든 해결한다. 플롯은 정교하고 묘사는 구체적이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강도나 살인사건부터, 테러와 국제 사기, 인종범죄와 같은 온갖 범죄와 범죄자의 군상들이 등장한다. 형사들은 결코 쉽게 해결하지 못한다. 때때로 정말 기발하고 희한한 사건이 발생하고 이것을 해결하는 과정은 무릎을 칠 정도로 생생하다.
둘째는, 단순히 재미를 넘어서 뭔가 사회를 투영하는 강렬한 시선을 느끼게 된다. 소설의 무대인 스웨덴은 우리에겐 북유럽 복지국가의 모범이자 사회민주당이 지배하는 중도 좌파의 나라다. 더군다나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복지국가체제는 대단히 성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 강경한 좌파에 속하는 발뢰와 셰발은 그런 사회의 그림자를 정면으로 드러낸다. 관료주의 체제의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탈락하는 인간 군상들, 복지국가의 이면에서 진행되는 부의 집중과 사회적 갈등들, 이민자의 증가에 따른 증오와 혐오 감정들. 오늘날 북유럽사회를 좀먹고 있는 사태의 원형들이 그것이다. 오늘의 스웨덴은 이민자가 10%를 넘어섰고, 수도인 스톡홀름의 폭력 수준은 1930년대 시카고가 연상될 정도로 심각하다.
셋째로, 이 작품의 문체는 간결하고 세련되다. 전문정보를 전달함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현학적이거나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범죄와 그 피해를 묘사할 때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에 보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오늘날의 스릴러소설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묘사를 남발하는 것에 비교될 만큼. 한마디로 부담스럽지 않고 각 권의 양 역시 적절하다. 출판 순서에 따른 각 권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 『로재나』 2.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3. 『발코니에 선 남자』 4. 『웃는 경관』 5. 『사라진 소방차』 6.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 7. 『어느 끔찍한 남자』 8. 『잠긴 방』 9. 『경찰 살해자』 10. 『테러리스트』.
《마르틴 베크 시리즈》 책들. 사진_엘릭시르 제공
빽이 통화지 않는 사회에서 쓰인, 범죄소설
나는 때때로 세계를 나누는 기준에서 스릴러소설이 쓰여지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이런 종류의 소설이 발원했던 영미권(우리가 펄프픽션으로 기억하는) 외에 유럽이나 일본을 제외한다면 스릴러소설(혹은 범죄소설)이 쓰여지는 국가는 정말 드물다. 왜 그럴까? 아마도 제대로 된 범죄소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적 안정성이 담보되어야 하고, 사회적 종교적 금기가 최소화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한 범죄자인데 누군가의 빽이 있어서 빠져나오는 사회의 범죄소설은 그럴 듯 하지 않고, 이슬람이나 기독교 원리에 저촉되면 불경죄에 빠지는 체제에서 현실을 체현한 묘사는 제한되기 일쑤이기에.
한국은 어떨까? 지금 시점에서 말하자면, 영화나 드라마, 심지어 웹툰에 비해서도 스릴러소설(혹은 범죄소설)의 수준은 그닥 괜찮지 않다. 그래서 주로 소비되는 작품들이 일본의 그것들이고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와 이사카 코타로가 유명할뿐더러 많은 영화들과 드라마의 원작이 되고 있는 이유다.
끝으로 이 시리즈에 대해 ‘스칸디나비아 누아르의 대부’라고 불리는 헨닝 만켈이 쓴 서문으로 마무리해 본다.
“이것은 현대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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