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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뒷날 풍경ㅣ서울의 밤, 4천의 의인들

 

2024-12-04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째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원래 이번 칼럼은 ‘올해의 책—야만에서 탈피하기’라는 제목으로 준비했었다. 한 해를 보내면서 기억나는 책들 이야기, 뭐 이런 것들을 섞어서 써보고 싶었지만, 어젯밤 모든 게 틀어졌다. 우리 공화국이 겪은 한 밤. 이 황당하고 무도했던 밤. 그래서 주제를 바꿔서 이 밤에 대해 쓰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12월 4일이다.)


시끄럽지만 흥겨운 발화(發話)의 자유


나는 지난 칼럼 ‘우리 남한을 바라보는 씁쓸함’이라는 제하(題下)의 글을 통해서 쇠국(衰國) 중인 우리 국가의 현재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했었다. 대통령에 대한 얘기로부터 혁신이 지체된 현 상황에 대한 우려까지. 입만 열면 나라 걱정이라는 꼰대들의 특징 그대로 근심을 담은 염려의 글을 썼다. 이런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나. 서로 다른 사상과 이론과 생각과 느낌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이런저런 생각들을 담아서 글을 쓰고 발표하고, 말하고, 떠들고, 그러다 좀 다투기도 하고. 시끄럽지만 흥겨운 이 발화(發話)의 자유야말로 우리 체제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비판하는, ‘자유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비판하는, 북한이나 중국이나 아프가니스탄이나 미얀마의 오늘을 우리가 넘어섰다고 자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과정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우리가 지난 70여 년간 겪은 역사적 곤경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한 덕분이다.


우리의 금도(禁度), 계엄


우리의 민주주의 체제, 이 시스템은 그래서 소중한 동시에 취약하다. 때때로 ‘갸우뚱한 균형’에 가까운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금도(禁度)가 있다.(이 말 자체는 신조어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나찌를 연상시키는 모든 것’이고, 미국에서는 ‘노예제의 흔적’에 비견할 수 있는 우리의 금도는 바로 ‘계엄의 추억’이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통해 박정희는 유신체제로 돌입했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통해 전두환은 광주학살의 주범이 되었다. 그 후 지난 44년간 우리는 금도를 지켜 왔다. 물론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 중간쯤 측근이었던 김진영과 하나회가 일으킬 뻔했던 위기 하나. 2016년 11월 박근혜 탄핵 중간쯤 준비했던 위기 둘. 아슬아슬했지만 결국 금도가 지켜졌고, 공화국은 진정한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금도가 깨진 밤


그리고 어제, 12월 3일 이 금도는 깨졌다. 윤석열은 한밤의 불청객처럼 나타나 비상계엄을 선언했고, 6시간 후 마지못해 해제에 동의했다. 이 자는 내란을 획책했고, 입법부를 공격했으며, 결과적으로 쇠국 중인 국가에 대못을 박았다. 이 자는 어제부로 어떤 정당성도 상실했으며, 국민의 대표임을 스스로 부정한 범죄자이다. 이 자의 모든 말은 범인의 변명이고, 이 자를 옹호하는 자는 내란 음모를 동조하는 자이다. 한 마디로 이 자는 더 이상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가 아니다.


어제 사태를 둘러싸고 무수한 기사와 평론과 분석이 이뤄졌다. 내가 여기에 무엇을 더하겠는가. 다만 세 가지 정도만 지적하고 싶다.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밤, 시민들이 국회를 막아선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사진 뉴스1

주술 정권


첫째, 이 정권의 본질은 정확히 ‘주술’(呪術)이라는 것. 대선 토론회 당시 윤석열은 임금 王자를 손바닥에 새겼다. 천공(이라 쓰고 한국판 라스푸틴이라 읽는)의 지도를 받는다고 본인이 인정한 바, 절대로 청와대로 가지 않고 용산을 고집할 때도, 의대 정원 확대를 반드시 二千에 맞추려 했을 때도 의심했었다. 그리고 어제 왜 12월 3일 10시 30분이었을까. 十二월, 三일 十시, 三十분은 王王王. 장소와 시간을 고르는 행위가 그저 점집에서 사주팔자를 보는 정도가 아니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주술(呪術)정권이다. ‘파묘(破墓)’의 용산 버전인가? (물론 정식 발동 시각은 11시라지만, 같은 시(時)안에서 이루어진 이 행위의 황당함이 명태균의 황금폰이 던진 위기보다 더 그럴듯해 보인다.)


엉성한 쿠데타


둘째. 이 정권의 능력은 정말 형편없다는 것. 국가 운영은 물론이고 심지어 쿠데타조차 이 정권은 (우스운 건지,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제대로 할 능력이 없다. 갑진(甲辰) 5적쯤이라고 얘기하고 싶은 자들, 그러니까 윤석렬, 국방부장관 김용현, 방첩사령관 여인형, 특전사령관 곽종근, 수방사령관 이진우 등등의 자들이 벌인 이 짓의 실체가 너무나 졸렬하다. 세상에 280여 명(물론 증원되었다고 하지만)을 동원해서 국회를 공격하고, KBS나 MBC는 놔둔 채, 뉴스공장의 김어준을 체포하려고 시도하고, 때아닌 선관위( 도대체 왜?)를 점거한다는 게 플랜이라고? 이 자들이 준비한 ‘계엄령 포고문 1호’의 위세와는 다르게 실제 행동은 너무나 나이브했다. 세간에서 이 자들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호기롭게 북진을 외치던 신성모 휘하의 장군들과 비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4천명의 의인이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모여 비상계엄 해제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 아시아경제 강진형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모여 비상계엄 해제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 아시아경제 강진형기자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졸렬하고 엉성한 쿠데타를 저지한 것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몰려가 군인들을 막아선 4천명의 의인(義人)들이었다. (물론 4천이라는 숫자는 단지 추정일 뿐이지만) 만약 그들이 없었다고 한다면, 군인들은 쉽게 의사당으로 진입해서 ‘계엄령 해제 결의’를 막았을 것이고 수방사 특임조는 이재명과 한동훈(엥?)과 우원식을 연행했을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된다. 아주 특별한 순간, 특별한 소수가 역사를 만든다. 우리는 이 4천명에게 역사의 빚을 진 것이다. (다만 총기를 손으로 잡는 행위는 위험했다. 그리고 나는 이 젊은 군인들 대부분이 메타 인지적으로 적절히 시간을 끌었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다행이다.)


이렇게 1차 쿠데타는 실패했다. 잔불이 남아 있고, 이 자들은 또 다른 음모를 획책할 것이다. 그저 이렇게 흘러갈 줄 알았던 역사의 수레바퀴는 미묘하게 방향을 전환했다. 더 이상의 불행을 막기 위해 윤석열씨는 하야하라. 능력에 부친 것으로 판명난 대통령 직을 던지고 몰디브 해변가에서 모히또를 즐기며 순애보를 완성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당신은 거기쯤이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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