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1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째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지난 번 칼럼 ‘주적 북한을 바라보는 씁쓸함’ 제하(題下)의 글을 보고 지인 몇 분이 지적을 해주셨다. 그래도 일국의 지도자인데, 뚱땡이라는 표현은 과한 것이 아닌가, 혹은 이 표현이 비만한 사람에 대한 비하의 의미를 띤 것 아닌가하는 지적이었다. 전자의 지적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후자의 지적은 분명히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뚱뗑이’라는 표현을 ‘고도비만자’로 바꾼다. 뭐. 이것도 비아냥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어쨌든 오늘은 고도까지는 아닌 듯하고 ‘다소’ 비만한 지도자가 계신 우리 남한을 바라보는 씁쓸함에 대한 얘기다. (정밀한 평론이나 분석은 많은 학자들에게 맡기고, 인상비평과 개인 감정에 의거한 순전히 자의적인 글임을 전제하고)
아직도 899일이 남았다
그러니까 오늘 21일 기준으로 윤석열 정부의 임기는 50%를 넘어서서 (아직도) 2년 169일(899일)쯤 남았다. 지지율은 25%를 하회(下廻)하는 정도로 고착되었다.(물론 이 지지율조차 나온다는 게 용하다고 보지만) 심심치 않게 탄핵이니, 퇴진이니 하는 소리가 들리고 교수들의 시국선언과 대학생들의 퇴진 요구가 잇따르고 있다. 보신(保身)이 체질화된 대학사회에서 이런 요구가 나온다는 게 사실 이례적이라고 보인다. 물론 여기에 대한 답으로 80년대를 연상시키는 부경대의 체포작전이 있었지만.
후대에 공백기로 기록될 듯
임기 중반을 넘어서는 이 정부에 대한 평가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거의 모든 분들이 내린) 박하다. 이 정부를 애초에 지지하지 않았던 분들이 아니라, 지역과 연령과 정치 성향을 떠나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의정갈등(의사파업이 맞는 용어인가)이 노년층의 지지도를 깎아버린 게 일종의 분수령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다. 어찌됐건, 정규재(보수 유투버이자 전 신문사 논설위원인)나 전원책 변호사가 일갈하는 바, 이 정권은 한마디로 형편없다. 도대체 지난 9백여 일 동안 이 정권이 한 일은 무엇인가? 기억나는 것은, 천공과 유전 소동과 잇따른 외교 참사들, 그리고 김건희, 김건희, 김건희. 성공적인 것은 정적에 대한 공격(아마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과 원전 수출과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정도. 이 정권은 무능하며, 범용(凡庸)하고, 상당히 후안무치(厚顔無恥)하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이 정권은 색깔이 없고 찌질하다. 그래서 아마도 후대의 평가에서 일종의 공백기나 휴지기(休止期)로 기록될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 답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권이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칠 확률은 대단히 높다. 대통령 본인이 ‘지지율 1%가 나와도 꿋꿋이 간다’(이 무슨 황당한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고 했고, 퇴진을 이끌 만큼의 에너지가 우리 사회에 재림할지 의문일뿐더러, 탄핵을 이끌 만큼의 정치적 연합이 형성될 확률도 별로 없다. 시니컬한 농담을 해보자면 이 정권은 ‘탄핵을 당할 만큼의 오류’를 범할 일조차 시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남은 899일은 이렇게 흘러갈 것이다. 희미한 새벽 안개 속에서 갈짓자로 걷는 취객의 행보. 물론 후대에 무능한 검사 몇 명과 음모가들이 권력을 잡을 경우, 이렇게 된다는 교훈이야 주겠지만.
물론 이와 같이 견제나 전복이 힘든 임기 5년의 단임을 전제로 한 ‘제왕적 대통령제’가 형성된 것은 87년 6월 항쟁 이후 각 정치세력이 타협한 결과다. 이른바 ‘87년 체제’가 구축된 지, 어언 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당시에도 제기된 근본적인 질문 ‘그렇다면 무능하거나 무도한 자가 권력을 잡을 경우’에 대한 답은 없다. 세간에서 제기되는 ‘원포인트 개헌’을 통해 대통령 중임제 혹은 내각제로 바꾸자는 논의가 현실화될 수 있을까? 누가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모르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그리고 그렇게 바꾼들 뭐가 달라질까?)
작은 미국이나 된 것처럼
문제는 이런 이전투구(泥田鬪狗)속에서 우리 남한의 역사적 가능성 역시 가라앉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나 혼란스러운 국제정세(미중갈등이 어떻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떻고 etc, etc)는 잠시 배제해보자. 저출생, 노인문제, 사회복지와 같이 우리에게 점점 부담이 되는 것들조차 배제해보자. 최근 10년간, 우리가 정말 혁신이라고 할 만한 중대한 기술적, 과학적 업적을 이룬 것이 있는가? 미래를 맡길 만한 새로운 유니콘기업이나 분야를 개척한 것이 있는가? 아니면 남들의 혁신에 최소한 편승이라도 가능할 산업구조상의 개혁을 이룬 것이 있는가? 내가 과문(寡聞)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없다고 답하는 게 맞다. 우리는 1998년 IMF위기 이후 2000년 즈음의 IT혁신(반도체와 초고속정보망 등)을 통해 얻은 먹거리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Size가 다른 중국을 비웃거나, 여전히 기초과학이 탄탄한 일본을 우습게 여기는 게 유행이다. 마치 무슨 작은 미국이나 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게 참. 몇몇 미국에 연을 대고 계신 검은 머리 외국인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흘수선(吃水線)이 내려가고 있는 통통배의 갑판에서 그저 어정대고 있을 뿐이다. 국뽕 쇼츠에 중독되어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서.
우리는 지금 쇠국 중이다
씁쓸한 것은 이런 식의 논의가 쏟아져도 대안을 내놓기가 무섭게 정쟁(政爭)화된다는 점이다. 주장을 하는 자의 색깔을 따지고, 이것을 통해 얻을 이익을 계산하고. 그래서 영화 ‘아저씨’의 표현대로 우리 모두 ‘오늘만 살고 있다’. 우리는 지금 쇠국(衰國) 중이다.
만약 어떤 중대한 돌파구가 마련되지 못한다면, 현재의 정치적 교착상태를 끝내고, 혁신을 통한 체제전환을 해내지 못한다면, 이 모든 번영도 한갓 화양연화(花樣年華)에 그칠 것이다. ‘오만전자’로 나락 중인 삼성의 위기가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길 바란다면 너무 늦은 것인가.
지난 기사
그냥 공백기라면 그나마 다행일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