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 2024-08-29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째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역사는 복잡계
‘비행기는 어떻게 뜰 수 있는가’ 1903년, 라이트형제가 비행기를 하늘에 띄운 이후 양력과 항력의 원리를 둘러싼 질문에 대한 답은 유체역학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문과생들이 기억하는 원리는 ‘베르누이의 정리’였을 것이다.(요새 문과생들은 물리학을 공부하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하지만 최근 대학 물리학과의 정기 커리큘럼에서 유체역학은 도외시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양력과 관련된 질문에서도 ‘쿠타-주코프스키 정리’가 정확한 답으로 제시된다.(전공자가 아니면 들어본 적도 없겠지만) 그만큼 똑똑한 물리학자들도 헤매기 일쑤인 부분이 유체역학 분야이다. 비슷한 것이 기상예보와 관련한 카오스이론에서도 발견된다. 흔히 슈퍼컴퓨팅을 이용해서 정확도를 비약적으로 올렸다고 얘기하지만, 당장 내일 날씨조차 제대로 맞추기가 힘들다.(기상청의 별칭이 구라청이 된 이유다) 즉, 너무 많은 변수와 조건이 교차하는 분야에서 이른바 ‘피드백’이 음양으로 증폭되면, 정확한 인과관계를 찾아내기가 어렵다. 때론 직관과 다른 결론이 유도되고, 때론 부정적인 요인들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나는 때때로 역사를 이런 종류의 ‘복잡계’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어떤 명확한 법칙이나 원리를 찾아내기 힘든 열린 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다는 핑계로 쉬운 답을 얻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별의 움직임으로부터 역사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성술처럼 특정한 몇 개의 사실로부터 보편적인 원리를 도출해 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추상적인 원리―신의 의지이거나 절대정신의 실현 같은―에 의거하여 현실을 재구성하고 도그마를 유도하는 사람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론을 내세워 오늘의 세계와 갈등을 해석하는 경향들 역시 이런 혐의에서 피해 가지 못한다. 마치 오늘의 이 갈등은 피할 수 없으며, 결국 전쟁 혹은 이에 준하는 폭력으로서 종결될 것이라는 생각들. 일종의 변형된 황화론(黃禍論)으로서 중국의 부활을 바라보는 인종주의적 편견들. 그러나 이런 ‘함정론’이 빗껴간 가장 최근의 예로서, 2차 대전 이후 미소 간의 갈등은 결국 전쟁 없이 종식되었다. 물론 냉전이라는 이름의 갈등이 45년간 존재했고, 서로가 상대의 전쟁(미국의 베트남전쟁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전쟁)에 조심스럽게 개입했지만. 결과적으로 미소 간의 갈등은 소련 측의 내파(內破)로 끝이 났다는 게 중론이다.
굳이 이런 식의 에두르는 얘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오늘날 미중 간의 갈등이 점점 더 그 강도를 높여가고, 그것을 부추기는 일군의 경향들 속에서 사태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 군인들이 훈련하고 있다 (사진_tasnimnews.com, 2023)
세 가지 전선
지금 세계는 전례 없는 폭염 속에서 말 그대로 기후위기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가 손을 맞잡고 ‘기후비상사태’에 맞서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기는커녕, 세 개의 전선이 형성된 심각한 전쟁의 시대를 맞고 있다. 그리고 내가 두려운 것은 이 갈등들은 어떤 방식으로라도 해소되겠지만, 인류의 공동선 혹은 최고 연대의 가치로서 ‘기후위기’에 대한 공동 대응의 기회조차 상실되는 것 아닌가하는 우려 때문이다.
이 세 개의 전선. 우크라이나전쟁과 중동의 임박한 갈등, 미중 간의 대립국면은 도무지 끝을 알 수 없지만 본질적으로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가 해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우크라이나전쟁. 개전 후 2년이 지난 지금, 명확해진 것은 러시아의 쇠락뿐이다. 전쟁이 어떤 식으로 결말나던, 러시아가 슈퍼파워에서 탈락한 지역 강국이라는 사실은 확인되었다. 항간에는 트럼프의 당선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젤렌스키라는 소문이 돌고 있지만(뭐. 사실일 거다) 적어도 징집 연령을 20대 후반 이상으로 잡고 군을 운용하는 우크라이나는 가상하다. 물론 러시아 입장에서 이 전쟁은 서방세계(흔히 미국을 의미하는)와의 싸움이지만, 설령 유리하게 전쟁을 마치더라도(요즘 봐서는 그럴 것 같지도 않지만) ‘피로스의 승리’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전술핵을 만지작거리는 게 섬뜩하지만.
그리고 오늘 아니면 내일 분명히 발발할 이스라엘과 이란과의 전쟁. 전쟁기계로서 이스라엘국가의 강력함은 인상적이지만, 궁극적인 질문 즉 중동에서 이스라엘은 장기적으로 존속 가능한가?라는 물음에는 답하기 곤란하다. 정말 문자 그대로 한 줌밖에 안 되는 이스라엘의 인구를 감안하다면, 미국의 후원 없이 유대국가가 중동에 가능한가? 오늘 이스라엘은 이란을 압도할 테지만, 내일도 그럴까. 시간은 결코 유대인에게 유리하지 않다.
마지막 전선. 우리 옆에 놓여 있는 이 전선. 위의 두 전선과 다르게 핵을 가진 슈퍼파워끼리의 갈등과 그 중앙에서 옴짝달싹하기 힘든 우리. 지난 10여 년간 한반도에서 진행된 일련의 군사적 움직임(사드와 평택과 강정)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이 전선에 명확히 편입되어 있다. 우리는 대부분 그 위험도를 알면서도 회피하거나, 뭣도 모르고 갈등을 증폭시키고 싶어하는 전쟁애호가분들과 함께한다. (이 분들은 딱하게도 중국공산당 창당 몇 주년이니, 시진핑 정권 몇 주년이니 하면서 자꾸 타임스케줄로 역사를 대체하려고 한다.)
2024년 8월 22일(현지 시간) 미국의 유도 미사일 구축함 랄프 존슨호가 대만해협을 통과하고 있다.(사진_u.s. navy 홈페이지)
민진당 독립파가 대만국가를 선언한다면
당연하게도 당장 미국과 중국 간에 전쟁이 발생할 확률은 희박하다. 아마도 미국은 지금보다 더 지능적이고 지속적으로 산업과 무역, 과학 분야에서 공세를 늦추지 않겠지만, 이에 군사적으로 대응했다가는 심각한 내상을 입고 추락할 중국은 결코 전선이 열전(熱戰)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는다.(일본 역시 이 입장인지는 의심스럽지만) 문제는 대만의 독립파(민진당 정권에서 주도권을 쥔)가 어떤 방식으로든 명시적으로 대만국가를 선언하는 경우일 것이다. 중국은 결코 이런 상황을 좌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경제나 지정학의 경계를 넘어선 국가(중국공산당)의 위신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지금처럼 중국이 요란한 훈련을 거듭하고 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두려운 것은 위와 같은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기가 너무나 용이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무슨 거대한 계획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전략적 준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마치 1차대전이 19세의 세르비아 청년(가브릴로 프린치프)이 벌인 어설픈 암살로 인해 촉발된 것처럼 그냥 그렇게 전쟁이 발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미국은 대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 것이고, 당연히 한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될 것인가? 남의 나라 전쟁은 스펙타클하게 보이지만, 우리가 엮인 전쟁은 짜릿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우리는 역사라는 복잡계에서 기우뚱한 균형을 너무 오래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이렇게 모든 것이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이는 밤에 하늘이 무너지는 게 무서워 견디지 못한 기나라 사람의 넋두리(杞憂)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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