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철학자 '풍우란'이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존 듀이의 프래그머디즘을 익히고, 몽테규의 신실재론을 받아들이며,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관심을 갖었다. 그렇게 박사과정을 마치고 중국에 돌아와 왕성하게 저작을 남긴다.
2024-12-05 윤지산
윤지산
퇴락한 고가에서 묵 가는 소리와 대나무 바람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선조의 유묵을 통해 중국학을 시작했고, 태동고전연구소에서 깊이를 더했다. 한양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인민대학교 등지에서 공부했다. 『고사성어 인문학 강의』,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한비자 스파이가 되다』 등을 썼고, 『순자 교양 강의』, 『법가 절대 권력의 기술』, 『어린 왕자』 등을 번역했다. 또 『논어』, 『도덕경』, 『중용』을 새 한글로 옮겼다. 바둑에 관심이 많아 〈영남일보〉에 기보 칼럼을 연재했다. 대안 교육 공동체, 꽃피는 학교 등 주로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곳에서 강의했다. 현재 베이징에서 칩거하며 장자와 들뢰즈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무의식을 탐구한다.
중체서용(中體西用)
1919년 가을 풍우란은 뉴욕으로 향하는 장도에 오른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부분 중국인이 그렇듯, 그 역시 장즈통(張之洞, 장지동)의 구호를 떠올렸을 것이다. “중학위체(中學爲體), 서학위용(西學爲用).” 사실 이 말은 리쩌호우(李澤厚, 이택후)가 서체중용(西体中用)을 들고나올 때까지 중국인 뇌리 깊이 박혀 있었다. 한류가 유행하기 전까지 한국인도 떨쳐버리기 쉽지 않았다. “동도서기(東道西器)”와 같은 말이다. “본(本)”과 “체(體)”는 한두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역사를 거치면서 농축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불교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생(空卽是生)”과 닿고, 성리학의 “체용(體用)”으로도 이어진다. 또 이 개념은 조선의 ‘사단칠정논쟁’과도 관계가 깊다. “월인천강(月印千江)”과 비교하면 큰 허물은 없다. “근본은 하나지만 드러나는 양상을 갖가지”라는 뜻이다. 서양의 과학이 우세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체는 정신세계, 용은 물질문명을 비유한다.
꺼지지 않는 교육열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역사가 짧다. 1783년 독립 전쟁, 1863년 남북 전쟁, 1918년 세계 1차 대전 등 전화(戰火)가 꺼지지 않는 신생 국가였다. 하지만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대학을 세우고 인재를 키운다. 이 인재들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국가는 다시 인재를 더 기른다. 선순환이다. 이 구도 일찍 깨달은 것은 고대 중국이다. 이 정신은 혼란기일수록 빛을 발한다. 이 전통은 우리에게 면면히 흐른다. 식민지, 내전, 좌우 이념 대립 등 현대사의 아픈 상흔에도 딛고 일어서 지금 위상에 올라서지 않았던가? 그 배경에는 교육열이 있다. 물론 과열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그 문제들 보듬고 새길을 열어가야 했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일갈했듯, 사람이나 국가는 제 장점 탓에 죽고, 그 장점 덕으로 다시 살아난다[如知窮而後如何著書也].
프래그머티즘(pragmatism)
컬럼비아 대학교은 1754년에 개교한 유서 깊은 대학교이었다. 미국 독립 이전이니 영국이 세운 학교이다. 영국의 전통이 깊게 배어 있다. 당시 미국 철학계를 주도하던 이는 컬럼비아 대학의 존 듀이(John Dewey)이었다. 풍우란은 그를 사사(師事)한다. 존 듀이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의 대가였다. 이를 ‘실용주의(實用主義)’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본래 취지를 반밖에 살리지 못한다. 그래서 ‘돈이 되는 것 뭐든지 한다’라는 이상한 (이명박 같은) 오해로 이어진다. 철학사에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실(實)’이다. 불교의 “공(空)”은 세계의 실상(實相)이며, 성리학의 “리(理)”는 실유(實有)이며, 조선 후기에 유행을 탔던 학문도 실학(實學)이다. 현재 한국 대학도 실용 학풍을 내세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진짜 리얼(real)해’라고 할 때도 실(實)이다. 이 개념은 시대와 공간,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이야기이다. 존 듀이의 프래그머티즘은 영국 철학자 흄과 닿아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이 경험을 해석하는 것이 진리이며, 이 진리는 우리에게 유용하다는 것(『펑유란 저서전』, 웅진지식하우스)”이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에게 유용(有用)해야 진리”라는 것. 그러나 이 ‘유용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프래그머티즘은 여기서 대해서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다음으로 풍우란이 영향을 받았던 인물은 신실재론자로 명성을 날리던 몽테규(William Montague)였다. 여기서도 ‘실(實)’이 등장한다. 중세에 성행했던 보편 논쟁(普遍論爭)을 떠올리시면 이해가 빠르다. 거칠게 정리하면, “인간”이라는 개념은 실재(實在)하는가? 아니면 단지 이름뿐인가? 물론 신실재론자는 전자를 지지한다. 이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 정답을 내놓을 수 없다. 풍우란은 신실재론자의 입장을 받아들인다. 귀국 후 여러 책을 쓰면서 서명에다 ‘신(新)’ 자를 즐겨 쓰는데, 이 영향의 흔적이다.
진화에 대한 오해
또 중요한 인물이 베르그송(Henri Bergson)이다. 옌푸(嚴復, 엄복)가 토머스 헉슬리(Thomas Huxley)의 『진화와 윤리』를 소개했는데, 이 “진화(evolution)”라는 개념이 중국인을 사로잡았다. 옌푸는 ‘evolution’를 ‘天演(천연)’이라고 번역한다. 다윈이 처음 ‘진화’라는 표현을 썼을 때, 가장 경계했던 것이 목적론적 진보/발전이라는 뉘앙스이다. 당시 서양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던 중국인들은 이를 극복하려는 열망이 강했다. 따라서 생물학에 기반한 우생학에 열광했던 것. 이런 풍조 아래에서 풍우란도 처음에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좋아했으나, 나중에 ‘분석적 사유, 실험적 수단’에 끌려 프래그머티즘과 실재론을 선호하게 된다(『四十年的回顧』, 科學出版社).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사실 중국철학은 베르그송에 더 가깝다. 차라리 베그르송으로 중국철학을 읽었으면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다. 이 부분은 차츰 논하겠다. 1923년 여름 “The Way of Decrease and Increse with Interpretations and Illustrations from the Philosophiess the East and the West”라는 긴 제목으로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귀국한다. 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왕성하게 저술하면서, 역대급 결과를 쏟아 낸다. 아래가 풍우란 자신이 정리한 저술 진행 과정이다.
1919~1926 : 『인생철학(人生哲學)』
1926~1935 : 『중국철학사』
1936~1948 : 《정원육서(貞元六書)》 = 『신리학(新理學)』, 『신세훈(新世訓)』, 『신사론(新事論)』,『신원인(新原人)』. 『신원도(新原道)』, 『신지언(新知言)』
1949~1990 : 『중국철학사 신편』
이 일련을 과정을 되새기면서, 『주역』의 ‘중천건(重天乾)’ 괘가 불현듯 지나갔다.
하늘은 쉼 없고, 군자를 이를 본받아 끊임없이 자신을 보듬어 가네[天行健, 君子以自強不息]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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