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다룰 현대 중국 철학의 주요 인물을 소개하고, 『주역』 해석의 다양성과 철학적 접근을 소개한다. 풍우란의 '신실재론'을 계기로 서양 철학 관점에서 중국 철학에 대한 재해석이 봇물이 터지 듯하고 있으며, 5세대와 6세대 중국 철학자들로 이어지고 있음을 다룬다.
2024-12-19 윤지산
윤지산
퇴락한 고가에서 묵 가는 소리와 대나무 바람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선조의 유묵을 통해 중국학을 시작했고, 태동고전연구소에서 깊이를 더했다. 한양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인민대학교 등지에서 공부했다. 『고사성어 인문학 강의』,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한비자 스파이가 되다』 등을 썼고, 『순자 교양 강의』, 『법가 절대 권력의 기술』, 『어린 왕자』 등을 번역했다. 또 『논어』, 『도덕경』, 『중용』을 새 한글로 옮겼다. 바둑에 관심이 많아 〈영남일보〉에 기보 칼럼을 연재했다. 대안 교육 공동체, 꽃피는 학교 등 주로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곳에서 강의했다. 현재 베이징에서 칩거하며 장자와 들뢰즈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무의식을 탐구한다.
세대 구분
앞으로 어떤 인물을 다루어야 갈 것인지 미리 예고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정리한다.
1세대: 량수밍(梁漱溟), 시옹스리(熊十力), 마이푸(马一浮), 장쥔마이(张君劢), 허린(贺麟), 치엔무(钱穆), 팡동메이(方东美) 등.
2세대: 당쥔이(唐君毅), 모우종산(牟宗三), 쉬푸관(徐复观) 등.
제3대: 위잉시(余英时), 리우슈시엔(刘述先), 차이런호우(蔡仁厚), 청중잉(成中英), 두웨이밍(杜维明) 등.
이들은 사승 관계로 서로 엮고, 또 국내 학자들과 관계가 깊은 이들도 있다. 실례로 모우종산은 시옹스리의 제자이고, 필자에게는 할아버지 선생님이 된다. 지금 중국 강단에 학자들은 4세대가 대부분인데, 이들 역시 곧 정년을 맞이했거나 앞두고 있다. 서세동점의 시대, 중국 철학계는 서양 철학과 마주하면서 자기반성을 치열하게 거쳤다. 예열하고 숙성했던 시간이 1세기를 지났다. 5, 6세대에서 역대급 철학자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한다. 중국 철학사에서 외래 사유가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불교와 마르크스주의이다. 처음에는 거센 물결에 당황하다, 깊이 연구하면서 중국화한다. 중화(中華)란 용광로의 다른 이름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불교를 체화하면서 신유학 곧 성리학(性理學)이 탄생한다. 넓게 보면, 양명학(陽明學)도 그 범위 안에 있다. 중국 사유와 마르크시즘이 만나면 무엇이 나올까?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잡탕이 아니라 새 요리를 창조해야 한다.
『주역』이란
또, 『주역(周易)』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달라는 말씀도 있었다. 단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다. 누가 언제 어떻게 썼는지 불명하고, 또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어떤 것도 확정된 것이 없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주역』에서 이를 두고 “인자가 보는 것을 인, 지자가 보는 것은 지다(仁者見之謂之仁, 知者見之謂之知)”라고 한다. ‘제 눈에 안경’인 셈이다. “周易”이라는 서명 자체도 명확하지 않다. “周”를 ‘두루(univesai)’라고 해석하는가 하면, ‘주나라의 주’로 보는 견해도 있다. “易”은 ‘간이(簡易)’, ‘변화(變化)’, ‘불변(不變)’이라고 해석한다. 사실, 이 해석도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간이와 변화, 불변은 범주가 다르다. 불변은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불변은 간이와 변화보다 상위 범주이므로 이 셋을 하나로 묶을 수도 없다. 『주역』의 언어는 또한 상징과 은유가 가득해서 단일한 의미로 포착하기 어렵다. 이런 측면에서 『주역』은 기호학이 아니라 징후학(symptomatology)이다. 지난 호에 소개한 ䷀(重天乾卦)를 ‘☎’ 같은 기호로 읽는 것이나, 괘를 해석하는 사람이 괘와 만나서 느끼는 ‘감응(感應)’ 포착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상(象)”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역』에 관한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역』은 ‘세계 전체에 대한 통찰’을 담은 책일 수도 있지만, 잘못 읽으면 사이비(似而非) 역술서로 전락한다. 후자의 피해가 어떤지 우리는 지금 현실에서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지 않는가! 더 깊이 알고 싶은 분은 심경호 선생이 번역한 『주역철학사(예문서원)』, 김용옥 선생이 쓴 『도올 주역 계사전(통나무)』를 권한다. 철학적 접근은 서양 철학의 힘을 빌리는 것이 더 빠르게 본의에 접근할 수 있다. “만물은 유전(流傳)한다”라고 주장한 헤라이클레토스부터 시작해도 좋다. 이어서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 헤드, 들뢰즈 같은 철학자들이 『주역』의 사유와 깊이 관련이 있다. 김용옥 선생이 화이트 헤드의 『이성의 기능』을 번역한 배경에는 이런 맥락이 서려 있다.
경허섭광(經虛涉曠)
다시 풍우란으로 돌아가자. 「신리학(新理學)」(『三松堂全集 4』)에서, 자기 철학 체계로서 신리학을 “가장 철학적인 형이상학”이라고 자칭하면서 공식화한다. ‘신리학’은 “송명 도학(道學)을 계승하지만 새롭게 재조명한다”라는 뜻이다. 나아가, 철학은 “순수한 사변적 관점에서 경험을 이지적(理智的, verstand)으로 분석/총괄하고 해석해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천명한다. 이렇게 최종 도달한 경계(境界)가 “경허섭광(經虛涉曠)”이다. ‘허’와 ‘광’은 같은 뜻으로, 경험과 무관한 차원이다. 경험이란 우리 신체가 오감(五感)으로 세계와 마주친 결과 즉 색깔, 소리, 맛, 냄새, 촉감 등 구체적 형상이다. 이러한 구체적 형상이 없는 세계가 ‘허’이자 ‘광’인 것이다. 이런 구도에서 실증적, 실제적 지식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것의 ‘너머’가 중요하게 된다. 이를 “구체적 형상 밖에서 노니는 것[神游于象外]”이라고 한다.
극고명(極高明)
풍우란이 이 기획을 통해서 목표한 바는 인간의 경계를 최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를 『중용』의 언어를 빌려 “극고명(極高明)”이라고 표현했다. 잘 알려진 대로, ‘허’와 ‘경계(境界)’ 같은 표현은 불교에서 자주 애용한다. 물론 도가(道家)에서도 즐겨 사용한다. 신실재론, 도가, 불교, 성리학이 다시 풍우란에게 내려앉은 것이다. 이에 대해 진위에린(金岳霖)은 “후스(胡適)와 달리 신실재론 관점에서 전통 사상을 이해하고자 한 노력(『中國哲學史』)”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풍우란이 이렇게 포문을 열자, 이후 ‘서양 철학의 관점을 빌려 중국 철학을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온다. 물론 지금도 그 물결은 거세다. 나아가, ‘두 철학의 만남을 통해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라는 고민도 깊어진다. 여기까지가 2기 풍우란 철학의 대략적 그림이다. 『정원육서(貞元六書)』가 나오고 그의 명성은 전국을 강타한다. 흥진비래(興振悲來), 항용유회(亢龍有悔)라고 했던가? 어두운 그림자가 살며시 다가오고 있었다. 1956년 마오쩌둥은 ‘백화제방(白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을 국무회의에서 선포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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