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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권의 동아시아 종과 횡 | 변방의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

최종 수정일: 3월 4일

 

개항 이후 지식인들은 서구 문물과 사상을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았을까. 소설은 한글로 썼지만 학문은 일본어로 했던 유진오 박사에게서 외래 사상의 수용자를 넘어 생산자이고자 했던 고뇌와 분투를 살펴보고, 해방 이후 한국어에 기반한 학문하기로의 전환을 그려보자.

2025-2-27 송병권


송병권 상지대학교 교수는 2011년 일본 토쿄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미일 관계를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7년간 편사연구사로 일했고, 다음 7년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와 한국사연구소,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2020년에 상지대학교에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근현대 동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지역주의, 지정학, 경제사, 정치사상, 국제관계사를 주로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현대 동아시아 지역주의: 한미일 관계를 중심으로』(2021), 『동아시아, 인식과 역사적 실재: 전시기에 대한 조명』(공편저, 2014), 『근대 한국의 소수와 외부, 정치성의 역사』(공저, 2017) 등이 있고, 번역서로 『일본 근대는 무엇인가』(공역, 2020), 『GHQ: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2011) 등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변경에 사는가


새로운 첨단 학문은 정녕 외부로부터만 오는 것인가? 이러한 고민은 아마도 꽤나 오래된 이야기인 듯하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이런 상황을 여러 번 목격하게 된다. 멀리는 고대사회의 불교 전파에서 조선 후기의 북학파까지, 가깝게는 개항 이후 서구 문물의 수입에서 현대의 해외 유학까지 우리 역사 전체에서 외부로부터 들어온 첨단 학문은 당연히도 손으로 뽑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경인 것인가?


원효의 깨달음, 의상의 당나라 유학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대사회의 확립을 확인하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가 불교의 전래이다. 불교는 서역에서 중국으로, 다시 한반도로 들어와서, 고대사회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평가이다. 우리는 삼국시대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하러 길 떠나는 이야기를 동화처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장차 위대한 승려가 될 두 젊은이는 칠흑같이 어두운 어느 날 밤 어느 곳에서 간신히 폐가에 몸을 뉠 수 있었고, 새벽에 뒤척이다 눈을 뜬 원효가 머리맡에 있던 시원한 그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문득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접고 돌아와 신라불교의 고유 종파인 해동종을 열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여기까지가 원효의 이야기이고, 의상은 그럼에도 기어코 당나라로의 유학을 단행했고, 신라에 화엄종을 널리 전파한 이야기는 또 하나의 서사를 들려준다. 우리나라에 산재한 수많은 절의 개창자로 의상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이나 불교계에 가진 그의 권위를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리라.


청 문물을 수용한 북학파의 실학


시대를 훅 건너뛰어 사신을 따라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열심히 견문하고 수많은 서적과 기기들을 가지고 돌아온 북학파가 고루한 조선의 유학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실학이란 새로운 장을 열었고, 이들의 생각들이 결국 조선의 근대로의 도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 강의실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와 김옥균 등 개화파의 젊은이들을 연결 짓는 사상사적 계보에 대한 해석을 들으며 근대사회로의 열망에 불타올랐던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왜, 서구 문물을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개항 이후 본격적인 서구 문물의 수입은 서양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수입이 아니라 초기에는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한 서적들, 그 다음에는 일본에서 일본어로 번역한 서적들로 이루어진 중역이 많았던 것 같다. 한문에 능숙했던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굳이 이를 한국어로 번역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이후에 일본어에 능통해진 신지식인들도 일본어로 중역된 서양 서적을 읽어내는 것에 만족했던 것처럼 보인다. 개항기에 그렇게도 중요하게 언급되는 미국학자 휘튼의 <만국공법>이라는 일개의 그러나 중요했던 국제법 교과서를 중국에서는 자국어인 한문으로 번역하고, 일본에서 이를 다시 역시 자국어인 일본어로 번역하는 상황 속에서도, 굳이 이를 우리말로 번역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어째서였을까? 당시에도 어쩌면 후진국 경제론의 효시였을 리스트의 저서가 <리씨경제론>이란 제목의 일본어로 번역되었지만, 이것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먼 훗날 1980년대까지 기다려야 했다. 외부의 학문을 내부로 가져올 때,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오역이든 의역이든 간에 발생할 치열한 고민들이 가져올 고통을 감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당시에 감내해야 했을 그 고통이 사실은 우리의 학문을 만드는 토대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서구 사상 중 '무엇을 번역할지'를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고등학교 시절 세계사 교과서에 등장했던 서구의 수많은 위대한 사상을 담은 저서들을 대학생이 되어 읽어보겠노라고 학교 도서관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상당수가 우리말 번역이 없었던 황망함은 기억에 새롭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교과서에 일목요연하게 나오는 이론적 설명 이상의 논의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영어는 물론이고,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를 공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현타가 왔던 순간도 있었다. 간신히 영어나 일본어 중역본에 기대어 모자란 공부를 이어갔던 것은 어쩌면 다행이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영어권과 일본어권에서 선택적으로 이루어진 번역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고민이 투영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을 번역하고 무엇을 무시할 것인지는 우리가 아닌 그들이 결정해 주는 셈이니까.


출발지가 논쟁과 비판으로 이룬 생명력과 다양성이 도착지의 획일화된 교과서적 해설로 전락


그 결과의 끝은 과연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 그 사상의 출발지에서 수많은 논쟁과 비판 속에서 끈질긴 생명력과 다양성에 충만했을 이론들이 도착지에서 획일화된 교과서적 해설로 전락하거나, 그것이 마치 처음부터 견고한 이론적 성취로 출발했던 것처럼 신학의 수준으로 받들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이미 자타 공히 경험했던 바일 것이다. 이것은 문화권력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선제적으로 외래 문화를 흡수한 문화권력은 외래문화의 지속적 소개와 그것의 독점적 해석이란 권력을 확보할 수 있지만, 여전히 불안함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유진오, 외래 사상의 수입상이 아닌 생산자를 추구했던


요사이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유진오라는 조선의 천재적 지식인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 같다. 식민지에서 당시 ‘국어’ 즉 일본어조차 일본인을 능가하며, 조선의 유일한 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던 유진오는 역시나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자신이 공부한 식민지 조선에 자리한 대학의 수준과 거기에서 공부한 자신의 수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친구 최용달과 함께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학계와 사상계의 유명한 인물을 찾아 면담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수준이 결코 일본에 비해 뒤쳐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다는 회고를 남기기도 했다. 유진오가 대학을 졸업하며 느꼈던 불안은 엘리트로서의 욕망이란 동전의 한 면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아마도 외래 사상의 수입상이 아닌 생산자가 되고자 하는 희망을 추구했던 욕망이었을 것이다.


유진오가 앉아서 강의하는 모습이다. 유진오는 1932년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자 강사로 초빙되었고, 1937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1939년에는 보성전문학교 법과 과장이 되었다.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학교로 승격한 후 제 2·3·4대 총장(1952.09~1965.10)을 역임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유진오가 앉아서 강의하는 모습이다. 유진오는 1932년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자 강사로 초빙되었고, 1937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1939년에는 보성전문학교 법과 과장이 되었다.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학교로 승격한 후 제 2·3·4대 총장(1952.09~1965.10)을 역임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소설은 한국어로 써도 학술 연구는 일본어로, 변방 지식인의 인정투쟁


그렇게 유진오는 생산자가 되어 자신의 학문을 시작했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구사되는 학문이었다.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빼어난 한국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그가, 어째서 일본어에 기반한 학문 생활을 시작했는지 그 속내를 들여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오가 한국어 신문에 실었던 저술은 본격적인 연구논문이라 할 수는 없었고, 본격적인 학술적 연구는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이런 사정은 식민지 조선의 학계가 한국어로 영위될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측면도 분명 존재하였겠지만, 학문의 언어를 일본어로 벼렸던 그로서는 수월성의 측면에서 학술 언어를 일본어로 선택했던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일본어로 영위되는 학계로에 대한 변방의 식민지 지식인의 인정투쟁이란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지성의 길- 탄신 100주년 기념학술논집』, 사단법인한국인문사회연구원 출간, 2007
『지성의 길- 탄신 100주년 기념학술논집』, 사단법인한국인문사회연구원 출간, 2007

유진오의 분투에서 해방 후 한국어에 기반한 학술어로의 전환을 그려볼 수 있다


당시의 그의 글을 읽어 보면 실정법적 테두리를 넘어서지 않으려는 당시의 주류적 법실증주의적 사고와 달리 실정법 자체를 상대화하려는 의식적 분투를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이 속에서 유진오는 해방 이후 한국어로 쓴 초기 저술에서 확인되는 식민지 해방의 논리를 벼리고 있었을 것이다. 변경의 지식인 유진오의 고뇌는 아마도 결코 당시 일본 법학계의 주류적 이론을 좇기만 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주류적 해석을 따라가는 것은 어찌 보면 편안한 길처럼 보이지만, 학문적 데이터와 데이터를 해석하는 사상까지 그대로 수입하는 데 만족해서는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혁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유진오의 학술언어 활동에서 볼 수 있는 일본어 글쓰기의 고뇌 속에서 해방 이후 한국어에 기반한 학술어로의 전환을 그려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마지막으로, 유진오가 저술한 일본어 논문들은 그에게 드리워진 친일 의혹과 무관하지만, 여전히 번역조차 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일본어 초고도 잊힌 상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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