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말과 민국 시기 고증학에 밀렸던 유학의 재해석이 활발했다. 이를 '신유가'라 하는데, 그중 업적이 뛰어난 8인을 '신유가 8대가'라 부른다. 그 대표 철학자 슝스리는 독학으로 '유식학'을 체계화했으며, 차이원페이 총장에 의해 북경대에 초빙되었다. 모우쫑산은 철학과 3학년 때 슝스리를 만나다.
2025-03-06 윤지산

윤지산
퇴락한 고가에서 묵 가는 소리와 대나무 바람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선조의 유묵을 통해 중국학을 시작했고, 태동고전연구소에서 깊이를 더했다. 한양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인민대학(人民大學) 등지에서 공부했다. 『고사성어 인문학 강의』,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한비자 스파이가 되다』 등을 썼고, 『순자 교양 강의』, 『법가 절대 권력의 기술』, 『어린 왕자』 등을 번역했다. 또 『논어』, 『도덕경』, 『중용』을 새 한글로 옮겼다. 바둑에 관심이 많아 〈영남일보〉에 기보 칼럼을 연재했다. 대안 교육 공동체, 꽃피는 학교 등 주로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곳에서 강의했다. 현재 베이징에서 칩거하며 장자와 들뢰즈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무의식을 탐구한다.
신유가 8대가(新儒学八大家)
중국인은 숫자 유독 ‘8’을 좋아한다. ‘八’을 ‘bā’라고 읽는데, ‘발전(發展)’의 ‘發(fā)’과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중국에서 최대 명절은 우리의 설날인 춘절(春節)로, 이때 대문에 ‘福’ 자를 거꾸로 많이 붙여 놓는다. ‘거꾸로’에 해당하는 중국어는 ‘倒’인데, 이 역시 ‘이르다’라는 뜻의 ‘到(dào)’와 같다. ‘福’ 자를 거꾸로 붙여 ‘복’을 부르는 염원을 담는다. 이를 미신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꺾이지 않고 희망차게 살아가려는 의지로 읽는 것이 좋겠다. “당송(唐宋) 8대가” 같은 명칭도 이런 맥락이 서려 있다. 당송 약 600년 동안, 문단에 이름깨나 알린 인물이 대략 3000명이라고 한다. 이들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별의 기준도 모호하며, 문학은 애초에 경쟁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더 발전하라는 소망을 담아서 8명을 가린다.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구양수(歐陽修), 소순(蘇洵), 소동파(蘇東坡), 소철(蘇轍),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를 “당송 8대가”라고 하는데, 중국을 두고 철학의 나라가 아니라 문학의 나라라는 평가도 있으니, 이 정도는 교양 차원에서 알아두자. 소순과 소동파, 소철은 부자지간이다.
현대 철학계에서도 이런 선발은 여전히 유행한다. 공자에서 한나라까지 성행했던 유학은 위진 남북조, 수, 당 동안 인기가 시들했고, 송, 명 때 부활했다가 청나라에서는 고증학에 밀린다. 청나라 말기, 민국 시기에 유학을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는데, 이들을 “신유가”라고 하며, 그중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들을 “신유가 8대가(新儒家八大家)”라고 부른다. “슝스리(熊十力, 1885~1968), 모우쫑산(牟宗三, 1909~1995), 탕쥔이(唐君毅, 1909~1978), 쉬푸관(徐复观, 1903~1982), 장쥔마이(张君劢, 1887~1969), 량수밍(梁漱溟, 1893~1988), 펑유란(冯友兰, 1895~1990), 팡동메이(方东美, 1899~1977)”가 그 주인공이다. 때론 마이푸(马一浮, 1883~1967), 량수밍, 슝스리 세 명으로 추려 “신유가 삼성(三聖)”이라고도 한다. 슝스리는 모우쫑산, 탕쥔이, 쉬푸관의 스승이다. 한 사문(師門)에서도 인재가 이렇게 쏟아져 나온 것도 드문 일이기도 하다. 사제 관계도, 동문끼리 사이가 말년까지 모두 좋았다고 한다. 이 역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스승 슝스리와 만남
모우쫑산이 슝스리를 만난 것은 북경대학교 철학과 3학년 때(1932년, 24세)였다. 모우쫑산은 자서전 『오십자술(五十自述)』에서 “삶 중의 일대 사건(生命中一件大事)”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슝스리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다. 1993년 임종 직전에도 슝스리의 적통/도통(道統)을 계승했음을 자랑스럽게 회고했다고 한다. 모우쫑산을 이해하려면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 “신유가”, “슝스리”, “도통(道統)”은 모우쫑산 철학의 핵심 키워드인 셈이다. 리쩌호우(李泽厚, 1930~2021)는 『중국현대사상사론(中國現代思想史論)』에서 ‘신유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신해(辛亥) 혁명과 5·4 운동 이후, 20세기 중국의 현실과 학술적 토양을 고려하면서 ‘공자, 맹자, 정호/정이, 주희, 육구령/육구연, 왕양명[孔孟程朱陸王]’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을 중국철학 혹은 중국 사상의 근본 정신으로 보고, 이를 주체로 삼아 서양 근대사상(예를 들면 민주주의와 과학)과 서양 철학(이를테면 베르그송, 러셀, 칸트, 화이트헤드 등)을 흡수 또는 수용하면서 개조하여, 현대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에 적용하고 현실적 출로를 모색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신유가의 기본 특징이다”, 물론 이와 다르게 정의하는 이들도 있지만, 큰 틀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모우쫑산이 북경대 재학 시절 철학과에 후스, 펑유란과 거물들이 즐비했다. 모우쫑산은 스승 슝스리의 학자로서 진지하고 엄숙한 기상에 깊이 매료되었다고 한다. 슝스리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않고 독학으로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젊은 시절에 ‘무창기의(武昌起義)’에 가담하는 등 혁명에 투신했지만, “공부 없이 어떻게 혁명을 이끌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가 들었으며, 자신은 혁명을 도모할 자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학문에 투신한다. 이후 3년 동안 칩거하면서 다양한 책을 독파한다. 그래서 첫 책 『심서(心書)』를 자비로 출판한다. 이때 친구 량수밍의 추천으로 당시 저명했던 불승(佛僧) 구양무경(歐陽竟無, 1871~1943)의 문하로 들어간다. 깊이 침잠하고 고심 끝에 『유식학개론(唯識學概論)』(1921년) 초고를 완성한다. 학문에 전념에 하는 이 기간, 슝스리는 적빈(赤貧)의 신고(辛苦)를 견뎌야 했다. 외투가 단 한 벌이라 세탁하면 다 말라야 비로소 외출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북경대에 강의하면서 정식으로 출판했고(1923년), 나중에 『유식론(唯識論)』으로 서명을 고쳐서 발간한다(1930년). 이 책 덕분에 슝스리는 전국적 인물로 발돋움한다.
량수밍은 극찬하면서 슝스리를 당시 북경대 총장이었던 차이원페이(蔡元培)에게 소개한다. 잘 알다시피, 차이원페이는 학벌, 학력, 학파를 따지지 않고 오직 실력만으로 인재를 등용하므로 가능했던 사건이다. 차이원페이가 없었더라면, 슝스리도 그의 세 제자도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으리라! 1932년, 『유식론(唯識論)』을 문언체(文言體)로 고쳐 『신유식론(新唯識論)』으로 출판한다. 슝스리하면 먼저 떠오르는 ‘신유식론’이라는 철학적 체계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마이푸가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중국 전역이 들썩거렸다. 선공에 나선 것은 불학계(佛學界)였다. 스승 격인 구양무경은 “성인의 말씀을 모두 멸절시켰다(滅棄聖言)”라고 혹평을 했다. 슝스리 입장에서 뼈아픈 고언(苦言)이었다. 다음 호에서 ‘신유식론’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모우쫑산의 사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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