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아 디자이너는 크리에이티브 디자인 스튜디오 ‘오늘의풍경’과 그래픽 디자인계의 성차별적 관행을 깨기 위해 활동하는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FDSC)’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 사단법인 두루, 한국성폭력상담소, 국제앰네스티 등 다양한 비영리단체, 사회적기업과 활발히 협업하며 시각적 결과물만이 아닌 함께하는 과정 자체를 디자인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2025-02-12 이담인 기자

'청소년기후행동'을 만나다
지난해 ‘닷페이스’를 운영했던 조소담 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청소년기후행동'이라는 시민단체로부터 기후소송 관련 국민참여의견을 모집하는 캠페인을 기획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더라. 그렇게 '청소년기후행동'과 연결이 됐다. 활동가들을 직접 만나 보니 그간 엄청나게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하며 열심히 '기후소송'에 임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임팩트를 내고 싶어 캠페인을 함께하기로 했다.
'기후대응 이의있음' 캠페인을 시작
'청소년기후행동'과 프로젝트 초반 1달 넘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후소송은 특정인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관여된 의제라는 게 일종의 난관이었다. 90살 할머니에게도, 5살 꼬마에게도 기후위기는 중요한 문제이다 보니 전 국민이 타겟팅의 대상이 된 거다. 여러 가지 고민을 쳐내고 딱 하나의 핵심으로 남은 것이 ‘사람들이 자기 말을 한 줄이라도 쓰게 하자’였다. 헌법재판소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직접 의견를 낸다는 사실이 투표만큼 중요한 권리 행사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이를 중심에 두고 ‘기후대응 이의있음’ 캠페인 기획을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문장으로 써서 전달하는 '직접 행동'
‘기후대응 이의있음’ 캠페인은 사람들이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에게 기후소송과 관련해 바라는 바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직접 쓰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요즘 캠페인들은 대부분 ‘10초만 투자해 주세요’라는 홍보 문구를 쓴다. 사람들이 쉽고 빠르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회 운동이 어렵고 무거운 것이라는 인상이 있다 보니 가볍게 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지만, 이는 독이 되기도 한다. 10초도 안 되는 경험은 그 사람의 기억에 어떻게 남을까? 이것이 누적되면 그저 귀찮은 노이즈가 되는 건 아닐까? 단순 이름을 써서 제출하는 것이 아닌 의제와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전달하는 건 좀 다른 기억으로 남을 거다. 그렇게 시간과 마음을 쓴 만큼 참여한 행동의 결과나 이후 추이에도 관심을 쏟을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하지만 동시에 참여를 이끌어내기 굉장히 어려운 방식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캠페인은 우리에게 하나의 도전이었다.

최대한 단순하게, 재판관에게 친구처럼

캠페인 웹페이지를 개한 스투키스튜디오와 미팅할 때마다 들은 말이 있다. 경험 상 사람들이 참여를 위한 아주 작은 허들조차 넘지 않으려 한다고, 그래서 최대한 설계를 단순화해야 한다고 누차 이야기해 주셨다. 우리도 처음엔 이것저것 여러 단계를 많이 넣었는데 스투키스튜디오의 조언을 듣고 최대한 단순화하려고 노력했다. 캠페인을 기획하며 고려한 또 하나의 지점은, 자신의 말이 재판관에게 전달되는 것에 대한 무거움을 덜어내 최대한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법이었다. 재판관에게 전달하는 문장을 곧바로 쓰기보다, 친구와 대화하는 것 같은 참여 방식으로 보다 가볍고 편안하게 다가가려 했다. 헌법재판소가 무서운 곳이 아니잖나. 의견을 냈다고 처벌하는 곳도 아니고.
헌법재판소를 가득 메운 말풍선

‘기후대응 이의있음’ 캠페인은 예상보다 더 큰 반응을 얻었다. 처음 청소년기후행동이 제시한 목표는 1000명이었는데 최종적으로 5289명이 참여했다. 헌법재판소에 보내질 문장이 단순히 숫자가 아닌 하나의 큰 임팩트로 보여지길 바랐기에, 캠페인에 참여하면 본인이 쓴 문장의 말풍선이 헌재를 둘러싸는 모습을 구현했다. 원래 참여자의 지역에서 헌법재판소까지 말풍선이 걸어가도록 하고 싶었는데, 스투키스튜디오에서 단호하게(!) 여건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5289개의 글들을 편집하고 묶어 책자로 만들었는데 두께가 상당하다. 청소년기후행동 홈페이지에서 책자와 캠페인 결과를 볼 수 있다. 헌법재판소에 제출된 국민참여의견서 보러 가기
여느 캠페인처럼 10초 안에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면 훨씬 더 많은 참여자를 모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결과물을 보니 디자이너로서 문제를 해결한 과정에 보탬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제출된 자료를 읽는 재판관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유려하고 정제된 문장보다 ‘저 기후위기 때문에 출퇴근이 너무 힘들어요’, ‘기후위기가 걱정돼서 불면증이 생겼어요’ 같은 솔직한 말들이 더 힘을 갖는 캠페인이었던 점도 좋았다.
오늘의 풍경, 세상을 바꾸려면 내가 일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코로나 팬데믹 때 거의 모든 활동이 온라인 기반으로 바뀌니 오히려 해외에서 열리는 디자인 관련 컨퍼런스나 워크숍, 각종 자료들에 쉽게 접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때 접한 다나 압둘라라는 런던에서 활동하는 디자인 저자의 글에 뼈를 맞은 기억이 있다.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래서 지금껏 무엇을 바꿨냐고 묻더라. 네가 디자인한 결과물을 누군가가 소비한 것만으로 너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행동했다’라고 생각하지 않느냐며, 너의 디자인은 결국 스스로를 포장하는 무책임한 행위 아니냐며 비판하는 거다. 그 외 온라인으로 공유되는 수많은 낯선 글을 접하며,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꾸려면 내가 일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단순히 의뢰를 받아 결과물을 주는 게 아닌, 협업을 통해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오늘의풍경' 협업 작품 바로 가기
디자인의 관계성을 고민하는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FDSC)'
비영리단체는 영리기업과 달리 프로젝트의 진행 방식과 결정 구조 등이 단체가 위치한 맥락이나 특수성 때문에 기존의 업무 방식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다(세상을 바꾸려고 모인 곳이니 다른 논리도 작동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래서 한 단체와 오랫동안 협업하면서 관계를 쌓고, 최적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게 '오늘의풍경'의 독특한 업무 방식이 됐다. 각 단체마다 여러 가지 작업 방식을 시도하며 맞춰가고 있다. 또한 비영리단체들은 자원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디자이너로서의 역할도 달라야 한다. 조직이 성장하고 활동을 널리 알리는 데 디자인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협업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생각을 다듬는 데는 FDSC에서 다양한 디자이너들을 만나는 게 도움이 된다. 학부생 때 영국 디자이너 노먼 포터의 '디자이너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밑줄 쳐가며 몇 번을 읽었다. 정답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FDSC는 나에게 정답은 없다는 걸 알려주었고, 시야를 넓혀주었다. 그만큼 디자이너가 무엇인지에 대한 상상력도 넓어졌다. 이런 유연성이 비영리 단체와 협업할 때, 사회 활동에 함께 할 때 도움이 된다.

변화와 행동을 만드는 디자인
기후위기와 같은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와 기업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은 개개인이 변화를 해야만 해결이 된다. '오늘의풍경'은 디자인이 사회적 변화의 과정이 될 수 있도록 해묵은 관습과 관성을 깨고, 관계 맺기를 통한 협업 방식을 지속적으로 실험해 보고 싶다. 내 자리에서 그렇게 해보면 안다. 이 일은 혼자 할 수 없다는 걸. 나와 엮이는 사람들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