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와 과학기술 | 기후위기의 해법, 생체모방기술이 뜨고 있다
- planetdami
- 3월 14일
- 4분 분량
자연의 원리를 모방해 기후위기 해결에 활용하는 ‘자연모방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흰개미집 구조를 적용한 친환경 건축, 고래 지느러미를 본뜬 풍력 터빈, 거미줄 단백질을 활용한 바이오 소재 등 다양한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자연이 진화 과정에서 완성한 지속가능한 해법을 산업과 기술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2025-03-11 이담인 기자
지구 생태계가 35억년 동안 발전시켜 온 ‘지속가능한 해결책'
'자연모방기술'은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생물의 구조와 기능을 모방하여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기술을 말한다. '생체모방기술(Biomimicry)'이라고도 불린다. '생물(bio)'과 '모방(mimicry)'의 합성어인 이 개념은 지구 생태계가 35억년 동안 발전시켜 온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핵심이다. 초과생산하지 않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임시방편보다 본질적인 해법을 찾는 자연의 원리를 인간의 산업과 기술에 적용함으로써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박쥐비행에서 도꼬마리의 벨크로까지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으로부터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어 왔다. 현재 남아 있는 자연모방기술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물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쓴 <새들의 비행>(Codex sur le vol des oiseaux)에서의 오니솝터(Ornithoper)다.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하며 수많은 역작과 연구물을 남긴 다빈치는 오랜 시간 새들의 비행을 관찰하며 꼼꼼히 기록했다. 인간의 비행에 관심이 깊었던 다빈치는 박쥐의 날갯짓을 모방해 오니솝터라는 비행물체를 발명했다. 다빈치의 오니솝터는 비행에 실패했으나, 이후 날개의 양력으로 비행하는 글라이더(glider)와 동력 비행기 발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가장 알려진 자연모방기술은 벨크로(Velcro), 일명 ‘찍찍이’다.1941년 스위스의 전기기술자였던 조르주 드 메스트랄(George De Mestral)은 산책 후 집에 돌아왔다가 도꼬마리가 옷에 여기저기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도꼬마리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다 도꼬마리의 갈고리 끝이 살짝 구부러져 있어 어딘가에 쉽게 붙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원리를 섬유에 적용하기 위해 오랜 시간 연구했고,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재닌 베니어스의 '생체모방(Biomimicry: Innovation Inspired by Nature)'

재닌 베니어스(Janine Benyus)는 미국의 임학자이자 생물학자다.
1997년『생체모방(Biomimicry: Innovation Inspired by Nature)』을 통해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혁신적 설계 원리를 학문으로 체계화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을 탐험하길 좋아했던 그는 인간이 발명한 많은 기술과 시스템이 자연의 솔루션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지고 지속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자연모방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베니어스는 『생체모방』에서 "생체모방 혁명은 자연을 채취하지 않고 자연에서 배운 것으로 새 시대를 연다"라고 밝혔다. 그는 자연이 오랜 시간 개발한 정보 전달 방식을 우리가 이제야 탐색하기 시작했으며, 이 분야가 산업적으로도 큰 잠재력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한국환경생태학회지(KJEE)에 발표된 「생태모방의 현재적 개념 -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생태적 접근」(배해진 외, 2019) 논문에서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자연모방을 보다 정교하게 정의하고 있다. 논문에서는 생체모방 연구가 생물특성기반 모방(Biology Push)과 기술문제기반 모방(Technology Pull)으로 나뉜다고 설명한다. 전자는 생물적 특성을 기반으로 기술적 응용을 연구하는 방식, 후자는 기존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자연에서 해답을 찾는 방식이다. 저자들은 두 가지 모방 방식을 통해 기후위기 시대 생물의 구조적 특징과 적응성, 자기조직화 능력을 활용하여 환경친화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군터 파울리의 '자연의 100대 혁신기술(Nature's 100 Best)'
자연모방기술을 토대로 한 '청색경제'라는 경제 모델도 존재한다. 벨기에 환경운동가 군터 파울리는 2008년 10월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회의에서 재닌 베니어스와 함께 쓴 '자연의 100대 혁신기술(Nature's 100 Best)'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는 이후 자신의 저서 『청색경제』에서 '청색경제'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며, 100가지 자연중심 기술로 10년간 1억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실제 군터 파울리는 세계적인 친환경기업 에코버(Ecover)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자연은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자연모방기술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친환경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수십억 년에 걸쳐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고래 지느러미 결절 모양을 모방한 축류팬(에어컨 팬)은 바람 저항을 줄여 에너지 효율을 높였다.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 위치한 이스트게이트 쇼핑센터(Eastgate Shopping Centre)는 흰개미 집의 환기 시스템을 모방해 설계된 건축물로 유명하다. 짐바브웨 건축가 믹 피어스(Mick Pearce)가 설계한 이 센터는 건물과 건물 사이 빈 공간을 많이 내어 약한 바람을 계속 공급함으로써 공기의 순환을 돕는다. 에어컨이 없기에 같은 건물 규모 대비 전력량을 10% 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자연은 폐기물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하루에 발생하는 전 세계 쓰레기의 양은 약 22억톤이다. 기후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주목되는 산더미 같은 폐기물들이 자연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낙엽이 떨어져 썩으면 유기물이 되어 다른 생명을 살리듯, 한 생물의 부산물이 다른 생물의 자원이 되는 것이 자연의 순환경제다. 거미줄 단백질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바이오실크(Biosilk)는 석유에서 유래된 합성섬유보다 훨씬 튼튼하면서도 생분해가 되는 특성을 지녔다. 이처럼 자연모방기술을 산업 시스템에 적용함으로써 자원 낭비와 오염을 줄일 수 있다.
38억년의 연구개발 과정을 거쳐 검증된 해결책
38억년의 연구개발 과정을 거친 자연의 해결책은 여러 방면에서 우리가 직면한 기후위기를 해결할 열쇠를 쥐고 있다. 자연은 극단적인 조건과 제약 속에서도 효율적이고 회복력 있는 시스템을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자연의 노하우를 활용하면 기후위기도 효과적으로 돌파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자연모방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철학적 전환을 요구한다. 자연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가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연이 수십억 년 동안 시행착오를 통해 완성한 지속가능하고 무궁무진한 해결책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재닌 베니어스의 말처럼, “우리가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살 수 있는지 겸손하게 자연에 묻는다면 인류에게도 기회는 있다.”
학제 간 협력을 통한 제도적 지원과 기초과학 데이타베이스 축적 필요해
자연모방기술은 기후위기 시대의 강력한 해결책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생물학, 공학, 디자인, 화학,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개발해야 하는 분야다. 학제 간 협력을 촉진하기 위한 제도적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의미다. 개발 과정에 비해 상용화 과정이 어렵기도 하다. 실험실에서는 성공해도 대량 생산과 시장 진입 과정에서 비용과 기술적 한계에 부딪히기도 한다. 정치적 지향과 상관없는 정부의 꾸준한 지원이 있어야만 기술의 상품화가 가능하다. 주요 선진국들은 2000년대 후반부터 자연모방기술의 미래 가치를 인식하고 연구 및 산업 분야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있다. 한국의 경우 기술적으로는 뒤처지지 않았지만, 대부분 공학적 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생물·생태 특성에 관한 기초자료가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더욱 효과적인 자연모방기술 개발을 위해 생물·생태 특성 조사와 분류에 관한 기초자료 데이터베이스 축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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