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식량 위기, 기후위기의 또 다른 이름
- planetdami
-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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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8 이담인 기자
기후변화와 국제 갈등이 심화되면서 식량 안보가 국가 안보의 핵심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상기후로 인해 농업 생산성이 저하되고 있으며, 글로벌 곡물 시장의 불안정성이 한국과 같은 식량 수입국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한국의 곡물자급률은 20.9%로 OECD 최하위권이며, 특히 밀과 옥수수의 자급률이 1%대에 불과해 식량위기에 취약한 구조다. 자급률 확대, 수입선 다변화, 탄소중립 농업 도입 등 장기적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 정부와 농민 간 양곡관리법 개정 논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기후위기 시대에 식량 안보를 지키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 논의가 절실하다.
식량난 대비를 마친 미국, 유럽, 호주…한국은?

유엔 기후변화 전문가이자 코이카 농업 ODA 전문가 남재작 박사는 국내 최초로 기후변화와 식량난을 다룬 『식량위기 대한민국』에서 “탄소중립과 식량 안보 없이는 더 나은 미래를 논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특히 식량자급률이 매우 낮은 한국은 이 위기에 가장 취약함에도 아무런 준비조차 되지 않았다고 경고한다. 2025년 국방부 예산 비율은 전체 예산의 약 13%로 예산 편성 순위 4위를 기록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많은 나라들이 국방부 예산을 중시한다. 나라의 안보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국가 안보'란 나라가 편안히 보전되는 것을 의미하며, 외부 위협에서 국민과 영토, 주권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힘을 말한다. 현대에 접어들어 전쟁 외에도 국민의 삶에 위협이 되는 요소가 늘어남에 따라 국가 안보는 기존의 군사, 정치 등 전통적인 개념에서 에너지, 식량의 범위로 확장되고 있다.
국제 갈등과 기후위기가 만들어낸 식량 안보 위기
'식량 안보'란 국가가 국내외 요소를 고려해 충분하고 안전한 식량을 언제나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2007년 기상 이변과 미국발 금융 위기로 촉발된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은 식량 위기가 석유, 경제와 함께 세계 3대 위기로 인식되도록 했다. 이는 곧 주요 식량 수출국의 식량 안보 사수로 이어졌다. 주요 밀 수출국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이 수출을 규제하자 국제 곡물 가격이 급등했다. 이렇게 발생한 식량 위기가 정세 불안을 야기했고, 소위 '아랍의 봄'(Arab Spring)으로 불리는 중동 민주화 운동의 주요 원인으로 꼽힐 정도로 정치 및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중국 등 많은 국가들이 자국의 식량 생산량을 늘리고 수입 비중을 낮추는 식량 안보 강화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식량보호주의를 발동했다.
21세기 이후 기후위기가 심각해지자 식량 안보에 대한 우려가 재차 높아졌다. 폭염, 가뭄, 홍수, 태풍 등 이상기후 현상으로 농업 생산성이 저하되는 것과 더불어 코로나19 팬데믹과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전 세계를 식량 위기 혼란에 빠뜨렸다. 유럽연합 내 밀 가격이 2022년에만 50% 넘게 상승했으며 가축 사료로 사용되는 옥수수 가격도 급등함에 따라 축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식량이 무기인 시대, 자국의 식량 안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기후위기와 식량 위기의 상관 관계
2023년 발표된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6차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농업 생산성은 증가세를 보였으나 지구 온난화, 강수 패턴 변화, 빙권 감소, 극단적 기상 현상 증가 등 기후변화로 인해 지난 50년간 글로벌 농업 생산성 성장이 둔화됐다. 이러한 부정적 영향은 주로 중·저위도 지역(한국, 일본,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등) 작물 수확량에서 두드러졌다. IPCC의 '기후변화와 토지' 특별보고서(SRCCL)에서는 기후변화가 식량의 가용성, 접근성, 활용성, 안정성이라는 식량 안보의 4대 요소에 모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온난화가 심화되면서 농경지 토양의 질이 저하되고, 토지 황폐화로 인해 농업 생산량 감소가 가속화되는 것이다.

또한 기상 이변 증가로 수백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정과 물 부족에 노출됐으며, 특히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최빈국, 군소도서국, 북극 지역사회와 소규모 식량 생산자, 저소득 가정, 전 세계 원주민들에게 가장 큰 영향이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와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이 공동으로 발간하는 <헝거 핫스폿(Hunger Hotspots) 보고서>에서는 식량 위기를 겪고 있는 주요 지역들의 현황을 확인할 수 있다. 2024년 6월-10월호에 따르면, 동아프리카 지역의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남수단이 지속적인 가뭄과 홍수로 인해 식량 안보 위기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이상 기온 및 강우 패턴의 변화로 쌀과 밀 생산량이 감소했으며, 중남미 지역 역시 엘니뇨로 인한 강수량 부족이 주요 작물 수확량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내전 등으로 만성적인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는 국가들이 기후위기 영향까지 심각하게 받으면서 식량 안보가 더욱 취약해지는 악순환에 빠져드는 것이다.

농업뿐만 아니라 수산업도 기후변화에 따른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해양 온난화와 해양 산성화는 주요 어종의 서식지 변화를 초래했고, 어획량이 감소되며 수산물 가격 상승이 지속되고 있다. 2022년 한반도 연안의 연평균 해수면 온도는 19.8°C로, 관측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2024년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열린 '2024 Global Seafood Market Conference'에서는 높아진 수온으로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 대구 어획량이 33% 감소했으며, 최근 3년 동안 감소세가 더욱 가속화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해양 생태계 변화가 어패류를 포함한 수산물 공급 부족을 야기하며 식량 안보의 또 다른 문제로 대두되었다.
'식량 안보 취약국가'인 한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발표하는 세계식량안보지수(GFSI) 순위에 따르면, 2022년 한국 식량 안보 순위는 113개국 중 39위로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에 속한다.
우리나라는 연간 국내 곡물 수요량 2300만t 가운데 1800만t을 수입하는 세계 7대 식량 수입국이다. 2022년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49.2%(사료용 포함시 22.3%), 곡물자급률은 20.9%이며 2021년부터 3년간 평균 곡물자급률이 19.5%로 집계되었다. 국내 곡물자급률이 50%가 넘어야 안정적인 식량 안보를 유지하지만, 우리나라는 곡물자급률이 낮고 수입 의존도는 높아 식량 안보가 취약한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밀과 옥수수의 자급률은 각각 1.1%와 0.8%로 매우 낮아 국제 시장의 변동에 대응이 어렵다. 대표적 서민 음식으로 물가 상승의 지표가 되는 라면의 경우, 2020년부터 2025년 현재까지 국내 주요 식품회사들의 라면 가격이 평균 30% 상승했다. 국제 곡물 가격 상승은 소비자들의 생활비 부담을 증가시켜 결국 장기적인 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

탄소 중립 전략이 필수인 식량 안보 강화
식량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대응이 필요하다. 우선적으로 기초 곡물 생산을 확대하고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밀, 옥수수, 콩과 같이 자급률이 낮은 곡물의 국내 생산을 늘리고, 농업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지원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해외 농업 개발과 수입선 다변화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해외 농업 개발을 통해 식량 공급원을 다변화하고,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며, 곡물 수입선을 다양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IPCC 보고서는 지속가능한 농업 및 식량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고, 탄소중립 등 기후위기 대응 전략을 강화하는 것이 식량 안보 확보를 위한 핵심 요소라고 강조하고 있다. 식량 비축과 비상 대응 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최소 6개월분의 식량을 비축할 수 있도록 목표를 설정하고, 비상 대응을 위한 물류 및 저장 시설을 확충해야 한다.
장기적 관점에서는 지속가능한 농업 및 어업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스마트팜 등 친환경 농업을 확대하고 식량 폐기물을 줄이는 정책과 관련 기술의 지원이 마련되어야 한다. 지역 농산물 소비 촉진과 함께 수산업 분야에서도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수온 상승으로 인한 조류 변화가 심각한 문제인 만큼 탄소중립을 최우선 목표로 해야 하며, 혼획과 남획, 해양 쓰레기로 망가진 해양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 지속적인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빠른 갈등 해결이 식량안보를 지킨다
기후위기 해결과 식량 안보 확립이 미래 세대 존속을 위한 과제가 되었다. 식량 안보 취약국가인 한국은 현재 「양곡관리법」과 「농수산물가격안정법」 개정을 둘러싸고 정부와 농민들이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갈등을 종식하고 논의와 화합의 단계로 넘어가야만 기후위기로 인한 식량 안보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식량 안보를 사수하기 위한 각국의 식량 관련 정책이 빠른 속도로 강화되는 가운데, 한국의 양곡관리법 개정안 갈등 해결 여부에 귀추가 주목된다.
기자수첩
애그플레이션(agflation)
농업(agriculture)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여 물가가 상승하는 현상을 뜻하는 신조어이다. 2007년 미국 증권회사인 메릴린치(Merrill Lynch)가 '세계 농업과 애그플레이션'(Global Agriculture & Agflation)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처음 사용한 후 널리 알려졌다.
IPCC 평가보고서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는 유엔환경계획(UNEP)과 세계기상기구(WMO)가 공동으로 1988년 설립한 국제 기구로,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적 평가를 제공하고 정책 입안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직접 연구를 수행하는 기구는 아니지만, 전 세계의 수천 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하여 기후변화에 관한 최신 과학적 연구를 종합하고 평가하는 보고서를 발간한다. 1990년 1차 평가보고서 발간 이후 2023년까지 총 6개의 평가보고서가 발행되었다.
SRCCL(Special Report on Climate Change and Land) 보고서
SRCCL(Special Report on Climate Change and Land, 기후변화와 토지 특별보고서)는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가 2019년 발표한 보고서로, 기후변화와 토지 간의 상호작용을 심층 분석한 자료다. 토지 이용 변화, 농업, 식량 안보, 사막화, 토지 황폐화, 온실가스 배출 등의 이슈를 다루며 기후변화가 전 세계 토지 생태계와 인류의 생존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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