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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이슬의 기후월령가 | 시작은 들어오는 게 아니라 세우는 것, 입춘

 

2025-02-03


[편집자 주]

'농가월령가'는 조선 시대에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서 일 년 동안 농가에서 계절과 날씨 변화에 따라 할 일을 달의 순서로 읊을 수 있도록 만든 노래이다. 기후변화가 날로 심각해지는 오늘의 농꾼들은 언제 씨앗을 뿌리고 기르고 거둘까? 전북 진안의 배이슬 농꾼은 "24절기는 해의 시간, 달의 시간이 아니라 농사짓는 시기를 24개의 점으로 찍어 놓은 '농부의 시간'이다."라고 말한다. 올 한 해 절기마다 그의 시간을 기록해 본다.

 

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사로 익힌 다름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농사를 알리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일터인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 농장이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는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

 

음력 정월에 눈이 많으면, 음력 7월에 비가 많이 온단다


설날, 무섭게 눈이 내렸다. 눈이 많은 진안이지만, 이토록 단시간에 많은 눈이 내린 것은 이례적이었다. 할머니는 겨울에 내리는 눈을 보며 이듬해 농사를 준비하고는 했다. 음력 동지에 눈이 많이 오면 이듬해 음력 5월에 비가 많고, 음력 정월달에 눈이 많이 오면 음력 7월에 비가 많이 온다고 했다. 서로 맞잡이라 눈이 내리는 꼴로 비도 온다고 했다. 할머니를 흉내를 내 눈이 내리는 꼴을 보며 올해 농사를 가늠해본다.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에 있는 마이산이다. 진안을 상징한다. 말의 귀를 닮은 두 봉우리에 하얀 눈이 내렸다. 사진_배이슬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에 있는 마이산이다. 진안을 상징한다. 말의 귀를 닮은 두 봉우리에 하얀 눈이 내렸다. 사진_배이슬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한여름 비를 대비해 미리 논물 드는 물길을 잘 정리해 두어야 한다. 사진_배이슬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한여름 비를 대비해 미리 논물 드는 물길을 잘 정리해 두어야 한다. 사진_배이슬

정월 초하루부터 폭설이 쏟아졌으니 한여름 비가 이 눈처럼 때려 부을지도 모른다. 미리 논물 드는 물길을 잘 정리해 논둑이 터지지 않게 하고 밭에는 물고랑을 더 깊게 내야겠다. 24절기는 옛 지식이라 할머니들이 날을 세던 음력을 기준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24절기는 태양의 각을 가지고 나눈 것이기에 양력으로 센다. 그러나 할머니는 24절기를 태양의 각도나 계절을 가르는 때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농사짓고 사는 이들의 ‘철’이었다.

철이 드는 것, 먹고 사는 것이 맞닿아 있는 그때를 알아 삶을 돌보는 것이 철이 드는 일이다. 1년을 태양이 뜨고 지는 것으로 나눈 매일을 해의 시간, 달이 차고 기우는 12달은 달의 시간이라면 24절기는 농사를 짓는 때를 24개의 점으로 찍어 놓은 ‘농부의 시간’이다.


얼어 썩은 씨감자를 살피고, 빼꼼 나온 싹은 똑똑 떼어 말려야


새해 음력 정월 달을 맞이하는 한겨울을 보통 농한기라 표현하지만, 겨울은 움직임이 덜 할 뿐 농사일이 한가한 것은 아니다. 휴면 기간이 일찍 끝난 몇 품종의 씨감자는 이미 싹을 기르기 시작하는 때라 이맘때 꺼내어 싹을 떼어낸다. 3월까지 내버려 두면 감자 싹이 많이 자라 감자는 쪼글쪼글해지고 힘이 약해진 감자는 제때에 힘을 내 자라기 어렵기 때문이다. 잘 보관했더라도 감자는 이맘때 꺼내어 그사이 얼어 썩은 것은 없는지 살피고 빼꼼 나온 싹을 똑똑 떼어 말려 다시 보관한다.

얼어 썩 은 감자를 골라내고, 감자 싹이 많이 자라면 감자가 약해져서 싹떼기를 해 줘야 한다. 사진_배이슬
얼어 썩 은 감자를 골라내고, 감자 싹이 많이 자라면 감자가 약해져서 싹떼기를 해 줘야 한다. 사진_배이슬

3년 전부터 기후에 맞춰 가지과(고추, 가지, 토마토) 싹틔우기를 늦췄다


이맘때 할머니는 설이 지나기 무섭게 고추씨앗을 물에 담그고 따뜻한 방구석에서 촉을 틔웠다. 그러나 달라지는 기후에 맞춰 3년 전부터는 가지과(고추, 가지, 토마토)의 싹틔우기를 부러 늦췄다. 모종을 기르는 동안 해가 덜 나도 평균기온이 높아진 탓에 본 밭에 내기 전에 너무 일찍 커버렸기 때문이다. 제때 본 밭에 나가지 못하고 부쩍 커버린 고추, 가지, 토마토들은 여름 내 몸집만 키우고 열매를 맺지 않기 일쑤였다.

욕심껏 불 때 가며 모종을 기른 것은 일찍 열매를 따기 시작해 더 많이 생산하려는 것인데 에너지를 더 들이고도 그러지 못하니 욕심을 내려 놓을 때가 된 것이다. 조금 느지막이 심어도 곧잘 자라는 만큼 덜 먹더라도 품과 에너지를 덜 들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가지과(고추, 가지, 토마토) 씨앗 넣기 과정. 사진_배이슬


할머니가 상업농 이전에 고추를 심던 때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달라진 기후에 외려 더 잘맞는다. 추위가 풀리는 만상일(마지막 서리가 내리는 시기) 즈음에 얕게 골을 타서 가랑파 씨앗과 고추씨앗을 섞어 직접 줄뿌림하면 추위 이후에 졸졸 싹이 난다. 뭉쳐 난 고추싹은 솎아내 나물로 먹고 한츰 자라면 김매기를 겸해 북을 준다. 고추는 옮겨 심어야 더 잘산다고도 하지만 제때 뿌리를 내리고 얕은 두둑에 자리 잡은 고추는 외려 관리도 덜하게 되는 것이다.


상업농 이전, 최소 자급을 중시했던 농사법의 회복탄력성이 훨씬 높다


아이러니하게도 기후가 달라져 농사의 때를 알기가 어려워 질 때마다 상업농 이전에 농사짓던 방식이 더 잘 맞는 경우가 있다. 농사의 때가 기후의 흐름과 다르게 급속도로 달라져 왔기에 오히려 매해 조금씩 다른 기후에도 최대한의 생산이 아닌 최소한의 자급을 중요시했던 농사법이 회복탄력성이 훨씬 높은 지혜로운 방식이다. 달라진 기후에 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의 대안이 아니라 전부터 이어져 오던 지혜를 빌려야 하는 때다.


눈이 쌓였지만 산개구리 떼거리 소리, 봄을 들이라는 신호


그렇게 겨울 한복판에 봄이 오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 입춘이다. 산속 계곡에 있는 마을의 풍경은 여전히 눈과 얼음이 생생하지만, 여지없이 개구리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호로록호로록 꼭 새 우는 소리 같기도 한 것이 떼거리로 소리를 낸다. 매년 ‘벌써?’하며 놀란 마음이 들고 번뜩 잠을 깨우듯 산개구리 소리를 귀담아 듣는다. 여전히 우리 눈에 비친 풍경은 한 겨울 속에 있지만 봄을 들이라는 신호다.

"호로록호로록", 겨울이 한참이지만 봄을 들이라는 신호가 들린다. 사진_배이슬


입춘(立春)은 봄을 '세우는' 때

입춘은 봄의 시작이라는 뜻이지만, 들어온다는 들 입 ‘入’을 쓰지 않는다. 세울 입 ‘立’자를 쓴다. 다르게 말하면 봄을 세우는 때라는 이야기다. 24절기의 시작이자 한 해의 시작으로의 봄은 문이 활짝 열렸으니 들어오시오 하면 쏙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산개구리 소리에 놀라 겨울잠에서 깨어 몸을 일으켜 세우듯 봄을 일으켜 세우는 때라는 것이다.

소복이 쌓인 겨울 사이로 봄을 더듬어 찾는 일로서 농부는 씨앗을 가린다. 올해 산밑 밭에는 언제쯤 무엇을 심을지, 씻나락은 잘 있는지, 눈 내린 꼴을 보며 어느 때 모종을 기르는 것이 안전할지 가장 바쁘고 중요한 농사의 때에 와 있다.


채종을 위해 장다리 박아 키운다. 사진_배이슬


암마 추워도 10년 전보다 차지 않은 겨울, 씨앗도 푹 자지 못해 힘이 약하다


장을 담고 씨를 가르며 밥상 위에서 농사를 세운다. 밤을 세워 씨앗을 가리고 눈밭에 서성이며 밭을 그린다. 암만 추워져 봐야 10년 전 겨울에 비하면 차지 않은 겨울이다. 밭에 온갖 풀들이 일찍 기지개를 켤 테고, 때아닌 더위에 씨앗도 푹 자지 못해 힘이 약해지는 겨울들이다. 갈수록 잘 영근 씨앗을 남겨야 하는 이유고, 극한으로 휙휙 바뀌어 대는 날씨에 대비해 밭에 봄을 세워야 한다. 어떤 시작도 절로 들지 않고 세워야 하는 것을 배우는 때, 입춘이다.

극한으로 휙휙 바뀌어 대는 날씨에 대비해 밭에 봄을 세워야 한다. 사진_배이슬
극한으로 휙휙 바뀌어 대는 날씨에 대비해 밭에 봄을 세워야 한다. 사진_배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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