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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성의 생태포럼 | 나무 껍질이 만드는 숲

 

2025-1-17 김우성  woosung.kim83@gmail.com


추운 북방 지역의 나무인 자작나무는 하얀 나무껍질이 특징이다. 자작나무 숲을 조성하려는 지자체가 늘고 있지만, 우리나라 기온에서는 자작나무 숲 조성은 어려운 일이다. 대신 거제수와 사스래나무를 추천한다.

 

눈처럼 하얀 나무 껍질 덕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나무가 있습니다. 자작나무입니다. 자작나무와 가까운 친척들의 모임인 자작나무속(屬, genus)에 속하는 나무들 중 우리나라에는 거제수, 사스래, 개박달, 물박달나무 등이 살고 있습니다. 나무 껍질의 색과 모양은 미묘하게 다르지만 대체로 밝은 색을 띠는 편입니다. 그중 자작나무의 껍질은 유난히도 매끈하고 밝은 흰색을 띱니다. 

자작나무 껍질은 유난하게도 하얗습니다.

왜 자작나무의 껍질은 흰색일까요? 자작나무는 원래 북방수림(北方樹林, boreal forest) 또는 아북방수림(亞北方樹林, sub-boreal forest)처럼 추운 지역의 숲에서 살아가는 나무입니다. 여름이 짧고 겨울이 오래 이어지는 숲에서 자라는 자작 나무는 일 년 중 오랜 시간을 잎이 없는 상태로 보냅니다. 겨울의 나무들은 밤에는 영하의 추위에 얼어붙었다가 낮에는 빛을 받아 나무 껍질이 뜨거워집니다. 오랜 시간 빛을 받는 남쪽면의 나무 껍질이라면 낮과 밤의 온도차는 더욱 커집니다. 나무 껍질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수축과 팽창을 계속합니다. 때로는 반복되는 수축과 팽창을 견디지 못하고 남쪽면의 줄기가 세로로 길게 터지는 큰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자작나무처럼 흰색 나무 껍질을 가지고 있다면, 낮 시간 동안 남쪽 면의 나무 껍질이 햇빛을 받더라도 대부분의 빛을 반사함으로써 밤낮의 온도차를 줄일 수 있습니다. 자작나무의 흰 껍질은 직사광선과 추위로부터 소중한 줄기를 지키기 위한 적응의 산물입니다. 


사람들은 자작나무 껍질을 다양한 곳에 활용했습니다. 자작나무의 껍질은 얇고, 잘 벗겨지며, 약간의 기름기를 머금고 있어 물에 젖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작나무 껍질의 이러한 특징을 이용해 카누의 마감재로 사용하거나 지붕을 덮는 방수재로 사용해 왔습니다. 또한 흰색이고 얇게 벗겨지는 특징을 이용해 자작나무 껍질을 종이 대신 사용한 기록도 있습니다. 추운 시베리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종이가 귀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작나무의 껍질을 벗겨 힘든 삶을 기록하거나 편지지로 사용했습니다. 2023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우크라이나가 함께 자작나무 껍질 편지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도 했습니다. 자작나무 껍질은 훌륭한 땔감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러시아의 숲에 머물던 시절 저와 동료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침엽수의 잔가지를 주워 모았습니다. 장작 아래에 자작나무 껍질을 넣고 불을 피우면 기름기를 머금은 자작나무 껍질에 빠르게 불이 붙었습니다. 가랑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불이 붙을 정도로 자작나무 껍질은 좋은 땔감입니다.

숲 속에서 불을 피울 때 자작나무 껍질과 침엽수 잔가지들은 아주 요긴한 땔감입니다.

러시아의 숲에서 자작나무는 산불 이후에 만들어진 빈 땅이나 숲틈에 자리를 잡는 나무입니다. 빽빽하게 자란 북방수림의 침엽수들이 만든 짙은 그늘 아래에서는 어린 자작나무가 자라기 어렵습니다. 산불이 나고 숲의 바닥에 빛이 들어오면 자작나무의 작은 씨앗들은 잔뜩 싹을 틔우고 빠르게 자라 숲틈을 채웁니다. 그리고는 숲의 바닥에서 그늘을 견디며 천천히 자라나는 어린 침엽수들에게 자리를 내줍니다. 러시아의 숲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들은 크고 늙은 나무와 가늘고 어린 나무가 공존합니다. 침엽수와 활엽수가 섞여 자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숲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들은 크기가 비슷하고, 나이가 같습니다. 씨앗이 싹을 틔우는 방식으로 자라지 않고 묘포장에서 길러진 묘목들을 옮겨 심어 키워냅니다. 기후가 다르고, 토양이 다르고, 숲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다르다보니 겪고 있는 문제도 다릅니다. 


러시아의 자작나무 숲에서는 다양한 종의 나무들이 함께 자랍니다.

추운 지역의 숲에서 살아가는 자작나무의 남방한계선은 북한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자연적으로 분포하는 자작나무 숲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자작나무 숲들은 모두 인공적으로 조성된 숲입니다.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매년 30~40만의 방문객이 찾는 명소입니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단순한 관광지의 역할을 넘어 지역 경제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경상북도 영양군 죽파리 자작나무 숲은 30.6ha 규모로 조성된 국내 최대 규모의 자작나무 숲입니다. 아직 원대리 자작나무숲 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인근에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많아 관광자원으로서 높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북 영양군의 자작나무 숲입니다. 흰 나무껍질과 얇은 나뭇잎이 만드는 빛이 아름답습니다.

최근 인제군과 영양군의 자작나무 숲의 사례를 보고 자작나무를 심는 지자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든 숲이 건강하고 아름답기를 바랍니다만 따뜻한 우리나라에 대규모 자작나무 숲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기대보다는 우려가 큰 것이 사실입니다. 아마도 원대리 자작나무 숲의 성공이 지자체 관계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가진 자작나무 숲이 생기고 소멸하는 산골 마을에 관광객이 찾아오는 장미빛 미래를 꿈꾸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작나무는 본래 추운 기후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따뜻한 지역에서는 생장 조건이 맞지 않아 활착과 성장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기후가 맞지 않는 곳에 무리하게 자작나무를 심었다가 상당수의 묘목이 고사하면서 조림이 실패한 사례도 보고된 바 있습니다. 자작나무와 같은 추운 지방의 나무를 심으려면 지역의 기후와 생태적 조건을 면밀히 검토해야 합니다. 무리한 조림은 나무에게도 사람에게도 지속가능한 선택이 아닙니다. 


자작나무는 크게 자라고 또한 오래 살 수 있는 나무입니다. 자연분포지역인 러시아의 숲에서는 대체로 150~200년 정도를 살아갑니다. 같은 종이라도 추운 지역에 뿌리내린 나무는 상대적으로 느리게 자라는 대신 조금 더 오래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의 숲에서 자작나무가 천수를 누린다면 150년 정도의 수명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숲은 자작나무가 오랜 시간을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않아 보입니다. 대한민국은 자작나무의 남방한계선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후변화로 인해 앞으로 기온이 더욱 상승할 가능성이 큽니다. 자작나무와 같은 추운 지방의 나무들이 생존하기에는 점점 더 어려운 환경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 심을 나무가 그 땅에서 100년 이상 살아갈 수 있을지 토양과 기후를 포함한 숲의 환경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나무든 사람이든 고향 땅이 아닌 곳에서의 삶은 꽤나 팍팍합니다. 더운 땅에 뿌리내린 자작나무의 삶 또한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자작나무는 고향 땅이 아닌 곳에서 건조, 더위와 싸워야 합니다. 자작나무를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요? 강원도의 산 꼭대기에는 거제수와 사스래나무 숲이 있습니다. 자작나무와 가까운 친척이고, 우리 숲에서 오랜 세월 건강하게 살아온 나무들입니다. 하얀 나무 껍질을 가진 신비로운 숲을 만나고 싶다면 거제수와 사스래나무 숲을 방문하면 될 일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나무 껍질을 보기 위해 자작나무 숲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자작나무 숲이 언제까지 인제군과 영양군에 머물 수 있을까요? 자작나무의 씨앗은 건강한 싹을 틔워낼 수 있을까요? 적지적수(適地適樹), 알맞은 땅에 알맞는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현재의 기후에 맞고, 미래의 기후에도 적응할 수 있는 나무를 심어주세요.

평창군 가리왕산의 고지대에서 만난 사스래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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