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성의 생태포럼 | 눈이 만드는 숲
- hpiri2
- 2월 14일
- 3분 분량
2025-2-14 김우성 woosung.kim83@gmail.com
겨울의 숲에 눈이 내립니다. 며칠을 내린 눈이 고요한 겨울 숲에 잔뜩 쌓였습니다. 추운 겨울날이 이어지면 눈은 며칠이고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나무들도 겨울에는 쉬는 모양입니다. 나무의 뿌리가 눈의 형태로 쌓여 있는 수분을 흡수할 수는 없겠지만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숲은 두꺼운 눈에 덮인 채 조용히 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복잡한 모양을 가진 눈의 결정들은 사이사이에 공기를 머금은 채 땅을 덮어줌으로써 단열효과를 제공합니다. 토양의 온도가 지나치게 내려가는 것을 막아줌으로써 땅속의 씨앗과 뿌리, 봄을 준비하는 새싹들이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숲에 내리는 비와 눈은 물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각각 액체와 고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이러한 상태의 차이는 물이 저장되고, 흘러가고, 증발하는 과정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비는 나뭇잎과 가지의 표면을 적신 뒤에 일부 증발하는 양을 제외한 대부분이 숲의 바닥에 도달합니다. 이후 토양에 흡수되면서 식물의 뿌리와 토양생물들에게 빠르게 수분을 공급합니다. 토양이 흡수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한 물은 지하수와 하천으로 흘러갑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리면 홍수가 나기도 합니다. 비는 빠르게 순환하는 물입니다. 반면 눈은 비보다 훨씬 천천히 순환합니다. 눈은 겨우내 숲의 토양 위에 잔뜩 쌓여 있다가 봄이 오고 기온이 높아지면 천천히 녹아내립니다. 눈은 마치 저수지처럼 물을 저장했다가 천천히 흘려보냄으로써 씨앗과 새싹들이 수분을 필요로 하는 봄의 대지에 물을 공급합니다. 여름에 많은 비가 내리면 몇 시간 뒤에 홍수가 나지만 겨울에 많은 눈이 내리면 봄에 홍수가 납니다. 실제로 러시아나 캐나다와 같이 추운 지방의 숲에서는 매년 봄에 홍수가 발생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추운 지방의 숲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 생태계가 있습니다. 높은 산의 꼭대기에서 만날 수 있는 아고산대(亞高山帶; subalpine forest) 숲입니다. 강한 바람과 낮은 온도가 지속되는 아고산대 숲에서는 전나무속, 가문비나무속, 소나무속의 침엽수들과 자작나무속의 활엽수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고산대 숲을 볼 수 있는 높이는 위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집니다. 보통 한라산에서는 해발고도 1500m 이상, 설악산에서는 1200m 이상에서 아고산대 숲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아고산대 숲 또한 추운 지방의 숲처럼 겨울에는 눈으로 덮여 있고, 봄이 되면 눈이 녹은 물이 하천을 따라 흘러내립니다. 아고산대 숲의 나무들은 눈이 녹은 물을 마시면서 건조한 봄을 견딥니다.

이 나무들은 어쩌다 산꼭대기에서 살게 되었을까요? 아고산대 숲에 사는 나무들은 본래 북쪽의 추운 지방에서 살던 친구들입니다. 빙하기에 한반도 남부지방까지 분포 영역이 넓어졌다가 빙하기가 끝나면서 따뜻한 날씨에서 잘 자라는 나무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게 되었습니다. 남쪽까지 내려왔던 나무들 중 일부 개체군이 날씨가 서늘한 산 꼭대기에 고립된 채 남겨졌습니다. 좁고 험한 산꼭대기에 고립된 채 분포하다 보니 개체수도 적고 번식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고산대 숲에서 살아가는 나무들은 대체로 기후변화나 멸종에 취약한 상태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라산 꼭대기에는 구상나무가 살고 있습니다. 한라산, 지리산, 덕유산 등 남부지방의 높은 산에서만 볼 수 있는 구상나무는 한국 특산종으로서 학명은 Abies koreana, 한국의 전나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특산종이지만 아마도 우리는 멀지 않은 미래에 야생의 숲에서 구상나무를 만나기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최근 한라산을 다녀오신 분이라면 한라산 꼭대기에 사는 구상나무 숲의 죽음을 목격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한라산의 구상나무 숲의 면적은 지난 백년간 절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따뜻한 바다에 둘러싸인 제주는 눈이 많이 내리는 섬입니다. 특히 한라산 꼭대기에는 더 많은 눈이 내리고, 오래 머뭅니다. 잔뜩 쌓여 있는 눈은 봄의 토양을 차게 유지하고 구상나무 숲에 충분한 수분을 공급합니다. 하지만 이제 한라산의 봄은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겨울이 따뜻해지면서 한라산 꼭대기에 남아 있어야 할 눈이 모두 녹아 버렸습니다. 구상나무들은 뜨겁고 건조해진 봄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20~30년에 걸쳐 한라산과 지리산, 덕유산의 많은 구상나무들이 말라 죽었습니다. 전문가들은 구상나무 숲의 보전과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뜨거워진 우리나라에서 구상나무 숲을 지키는 일은 어려워 보입니다.

저는 스물한살,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눈싸움을 해봤습니다. 저와 눈싸움을 하던 후배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저에게 외국에서 살다 왔냐고 물었습니다. 저의 고향인 울산에는 눈이 내리지 않습니다. 겨울에도 비가 내리거나 대체로 진눈깨비가 내립니다. 어쩌다 눈이 내리더라도 금세 녹아 버립니다. 눈싸움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잔뜩 쌓인 눈은 성인이 된 후 서울에 가서 처음 보았습니다. 겨울이 따뜻해지고 눈이 사라진다는 것은 눈싸움을 할 수 없다거나 눈사람을 만들 수 없어서 슬픈 어린이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눈이 없으면 눈이 만드는 숲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아고산대 숲, 북쪽 추운 지방의 숲들이 따뜻해진 겨울, 건조해진 봄에 밀려 사라지고 있습니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봄이 아고산대 숲에는 뜨겁고 건조한 계절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올해도 구상나무 숲은 줄어들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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