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3 김우성 woosung.kim83@gmail.com
베어진 나무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우리는 가운데가 비어 있는 커다란 나무 속에서 겨울잠을 자는 곰에 관한 이야기를 듣거나, 속이 빈 커다란 나무 속에서 비를 피하는 어린이들의 모험 이야기가 담긴 동화를 읽습니다. 가끔은 실제로 가운데가 썩어 있는 나무를 만나 그 속을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구멍을 통해 오랜 시간 땅 아래와 땅 위 생태계를 연결해 온 나무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비록 줄기의 속은 썩어 비어 버렸지만 여전히 멋진 노거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나무도 있습니다. 사람과 가까이서 살아가는 나무들 중에는 위험해 보인다는 시선 때문에 제거되는 나무도 있습니다. 나무는 왜 가운데 부분이 썩는 걸까요?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큰 나무도 시작은 작은 씨앗입니다. 아주 작은 씨앗은 아주 작은 새싹을 틔웁니다. 작은 새싹은 연한 줄기 끝에 달린 작은 잎으로 아주 조금 광합성을 합니다. 소중한 포도당을 모아 일부는 녹말로 저장하고, 일부는 셀룰로스(Cellulose)를 만들어 연한 줄기의 겉을 감싸 조금 더 튼튼한 줄기를 만듭니다. 작은 새싹은 이 일을 매년 반복하면서 어린 나무가 되고, 다른 나무들과 경쟁하며 큰 나무로 자라납니다. 새싹이 보낸 매년이 나이테로 기록됩니다.
나무가 자라는 과정은 끝없는 벽돌쌓기와 같습니다. 뿌리는 땅속 깊이 뻗어 물과 무기양분을 빨아들이고, 이 물과 양분은 줄기 속 물관을 통해 나무 꼭대기의 잎까지 전달됩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잎은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면서 포도당을 생산합니다. 잎에서 만들어진 포도당은 체관을 통해 다시 나무의 아래로 내려갑니다. 나무 줄기의 껍질 아래 있는 형성층에서는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집니다. 형성층에서 새로 만들어진 세포들은 물과 양분을 운반하는 물관과 체관으로 분화하거나, 나무의 표면을 보호하는 피층과 코르크층이 됩니다. 나무가 자라면서 줄기 안쪽의 세포들 중 오래된 물관세포들은 더 이상 물을 운반하지 않는 죽은 세포가 됩니다. 심재(心材, heartwood)라고 부르는 이 부분에는 셀룰로스와 리그닌(Lignin) 같은 단단한 물질이 잔뜩 쌓여 있습니다. 튼튼한 목질부는 나무가 더 높이 자랄 수 있도록 든든한 기둥이 되어 줍니다. 줄기의 바깥쪽에 있는 세포들, 형성층과 체관을 포함한 변재(邊材, sapwood) 부분은 살아있는 세포들이며 물과 양분의 이동, 에너지의 저장과 같은 역할을 담당합니다. 나무가 자람에 따라 줄기 안쪽의 죽은 세포 비율은 점점 증가합니다. 거대한 나무의 줄기에서 살아있는 세포들은 줄기 바깥쪽에 얇은 막처럼 존재하는 형성층과 물관 일부, 그리고 체관 세포뿐입니다.
아무리 큰 나무의 줄기도 나이테의 한가운데는 1년생 어린 새싹 시절에 만든 세포입니다. 맨 처음 작은 새싹의 여린 줄기였던 곳은 시간이 지나도 단단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무에서 부후에 가장 취약한 곳은 가운데부분인 수(髓; pith) 부분 입니다. 셀룰로스는 식물 세포벽의 기본 구조를 제공하고, 리그닌은 세포벽을 단단하게 하면서 방수 기능을 부여하는 물질입니다. 유세포(parenchyma cells)로 이뤄진 여린 줄기였던 수 부분의 세포는 셀룰로스와 리그닌의 함량이 낮습니다. 강도가 약하고 부후에도 취약한 대신 구조적으로 유연합니다. 빛을 찾아서, 더 나은 환경을 찾아서 빠르게 성장의 방향을 조정해야 하는 어린 나무는 단단함보다 유연함이 더 필요한 모양입니다.
커다란 나무의 깊은 안쪽, 나이테의 가운데 부분이 썩어서 구멍이 생기는 것은 꽤나 흔하고 또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심재를 부후로부터 지켜 낼 수 있는 능력은 종에 따라 다릅니다. 주로 침엽수들이 부후에 강한 경우가 많습니다. 침엽수의 심재는 세포 안에 송진과 같은 물질을 축적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방수성과 방부성이 뛰어납니다. 송진은 심재의 죽어 있는 세포들 사이를 채우며 물과 병원균의 침입을 막음으로써 나무를 오래 튼튼하게 유지합니다. 활엽수 또한 탄닌이나 플라보노이드 같은 다양한 화합물을 통해 곤충이나 곰팡이에 대한 저항성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이 썩어 버린 나무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나무꾼들입니다. 목재를 얻기 위해 기른 나무의 가운데가 썩어 있다면 목재의 가치는 크게 떨어집니다. 부후의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중앙부가 넓게 썩어 버린 목재는 땔감처럼 부가가치가 낮은 용도로밖에 쓸 수 없습니다. 나무꾼들은 속이 썩은 나무를 가려내는 노하우를 갖고 있습니다. 나무의 형태, 뿌리 부근에서 자라고 있는 버섯, 벗겨진 껍질이나 나무구멍 등 겉으로 드러나는 요소들을 관찰하는 것은 꽤나 전통적인 방법입니다. 현대적인 장비를 이용해 전기전도도를 측정하거나 음파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줄기에 깊이 구멍을 뚫어 나무 속의 조직을 꺼내보는 방법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숙련된 나무꾼들은 도끼나 망치로 나무 줄기를 퉁퉁 쳐 보는 것만으로 속이 비어 있는 나무가 들려 주는 울림의 차이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같은 시기에 심은 비슷한 크기의 나무들로 채워진 숲에서도 나무들의 속사정은 저마다 다릅니다.
생존 전략에 따라 부후에 대한 내성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작은 씨앗에서 출발하는 작은 새싹들은 어린 줄기도 가늘고 작습니다. 자연스럽게 부후에 약한 수 부분의 비율도 낮습니다. 하지만 잘 발달된 뿌리나 줄기 또는 가지에서 단숨에 자라나는 움싹의 경우 약한 수 부분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연한 조직임에도 내실을 다지지 않고 빠르게만 자란 움싹들은 더워서 말라 죽고, 추워서 얼어 죽고, 초식동물에게 먹히거나 부후균의 침입을 받는 등 다양한 이유로 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만 하면 단숨에 빛이 있는 공간을 선점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종의 나무들이 움싹을 틔워 내는 전략을 선택합니다. 사람도 비슷합니다. 물려받은 자원이나 다른 일을 통해 저장해 두었던 자원을 새로운 영역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빠르게 성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실패하는 경우도 많지만, 튼튼한 회복력을 바탕으로 다시 도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씨앗으로 번식할 것인가, 움싹으로 번식할 것인가, 빠르게 성장함으로써 자원을 선점할 것인가, 내실을 다지며 때를 기다릴 것인가 하는 것은 나무의 삶에서 만나는 지극히 경제적이면서도 전략적인 선택의 문제입니다.
매년 봄 우리에게 눈부신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벚나무들은 수명이 짧습니다. 상처를 회복하는 능력도 부족합니다. 나무의 가운데는 썩어 있는 경우가 많고, 줄기의 주변에서 복숭아유리나방이 만든 상처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아마도 꽃을 피우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느라 다른 부분을 보살필 여력이 없는 모양입니다. 벚나무는 작고 말랑말랑한 새싹이었던 시절의 기억이 담긴 나이테를 모두 잃었습니다. 어린 나무였던 시절의 기억이 담긴 나이테도 모두 잃었습니다. 그 부분은 모두 분해되어 사라지고 빈 공동(空洞)만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말랑말랑한 어린이였던 제 모습은 여전히 제 안 깊은 곳 어딘가에 남아 있을까요? 아니면 이미 분해되어 사라졌을까요? 어쩌면 제 딸아이의 모습 속에 일부 남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속이 비어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그 또한 제가 쌓아 온 시간의 결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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