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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란 무엇인가② | 일제 식민 지배를 미화하는 ‘식민지근대화론’(1)

 

일본의 산미증식계획, 수리조합으로 조선인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농경지를 빼앗겼음을 밝혀, 뉴라이트가 주장하는'식민지근대화론'이 허구임을 말한다


2024-11-14 박한용



박한용 | 역사평론가, 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제강점기 반제동맹 조직운동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순천향대·한성대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대학원 강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교육홍보실장 등을 거쳤다. 주요 논저로 「1920년대 후반 국제반제동맹의 출범과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대응」, 『일제강점기 친일세력 연구』(공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공저),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변준호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영주독립운동사』(공저), 『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 역사 1, 2』(공저) 등 다수가 있다.

 

일본의 식민 지배는 ‘문명사의 대전환’이었다?


뉴라이트의 핵심 주장인 ‘식민지근대화론’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글은 사실상 뉴라이트 역사관의 대부라 할 이영훈(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현 이승만학당 교장)이 주요 필자로 참여한 『경기도 현대사』(2013, 경기도)의 다음 글이다.


“요컨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거치는 동안 한국 사회는 슬슬 근대문명의 사회로 바뀌었다. 일본 역시 서유럽으로부터 근대문명을 받아들인 국가이다. 그 근대문명의 법과 제도가 일본의 지배를 통해 한국으로 이식되었다. 근대문명의 핵심 요소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이다. 식민지라는 종속적이며 왜곡된 환경에서도 그러한 문명의 요소는 이식되고 확산되었다. 대한민국은 그러난 ‘문명사의 대전환’ 과정에서 생겨난 국가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새로운 문명의 원리에 따라 새로운 국가가 세워진 것이다.”(『경기도 현대사』, 49쪽)


윗글에서 보듯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은 단순히 일제강점기 경제성장만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일제의 식민 통치 덕분에 ‘자유’와 ‘권리’라는 새로운 문명의 원리가 확산했고, 그 바탕 위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했다는 주장이다. 일제강점기는 ‘문명사의 대전환’이라는 놀라운 전제 아래 일제가 구축한 물적 인프라스트럭처와 인적 인프라스트럭처 덕분에 해방 후 대한민국 특히 박정희 집권 시기의 ‘고도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일찍이 일본의 제국주의자들과 현대 일본 우익들이 주장하는 일본 덕분에 식민지 조선이 빠르게 근대화되었으니 한국인은 일본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식민지 시혜론’의 부활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황당한 주장을 『경기도 현대사』에 버젓이 실어 경기도 공무원 교육교재로 사용했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이 교재 편찬 당시 경기도지사는 그의 대학 동기인 김문수 현 고용노동부 장관이다).


식민지근대화론: 일본이 한국 근대화의 물적, 인적 인프라스트럭처를 구축하다?


뉴라이트는 일제가 각종 근대제도를 도입하고 철도·도로·항만·공업화·농지 정비 등 물적 인프라스트럭처를 확충해 해방 후 대한민국의 근대화의 물적 기반은 남겨 주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반이 있었기에 박정희의 근대화 개발은 다른 개발도상국가보다 앞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근대화의 물적 인프라스트럭처 구축론).

한편 일제가 근대적 교육기관을 확대함으로써 조선인은 비로소 문맹인에서 문명인으로 전환되었고 이들이 훗날 박정희 집권기의 ‘조국 근대화’의 대중적 저변이 되었다고 한다. 또 일제강점기에 적지 않은 조선인들은 조선총독부와 같은 식민 통치 기구에 ‘참여’함으로써 ‘각종 근대 국가 운영의 경험과 능력’을 축적했고,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이 이들을 중용함으로써 이들 덕분에 대한민국은 빠르게 효율적인 근대국가 체제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근대화의 인적 인프라스트럭처 구축론).

요컨대 일제가 구축한 물적 기반과 일제에 의해 ‘문명교육’을 받은 세대와 친일부역자들이 대한민국 성공신화의 역사적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근대화 프로젝트인 셈이다.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은 정치·경제·사회·문화·보건·의료·일상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주장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일일이 열거하고 반박하자면 한 권의 책으로도 부족하다. 불가피하게 이들의 대표적인 주장 몇 가지만 검토하기로 하자.


항일투쟁은 야만의 몸부림?


먼저 이들은 일제의 대한제국 식민지화를 다음과 같이 거의 축복 수준으로 묘사하고 있다.


“1860년대부터 본격화한 위기의 와중에서 조선 사회는 분열하고 정치는 통합력을 상실하였다. 보기에 따라 위기는 1905년 조선왕조의 멸망이 어떤 강력한 외세의 작용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모든 체력이 소진된 나머지 스스로 해체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 2004)


일본의 침략보다 스스로 망해가는 조선왕조(대한제국 자멸론)를 식민지로 삼아 경제를 안정시키고 개발시켜 윤택하게 했을 뿐 아니라 모든 제도를 근대화시켰다, 그것은 야만과 몰락의 대한제국 인민들에게 일제의 식민지화는 축복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구한말의 항일투쟁은 문명의 축복을 거부하는 야만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동학농민전쟁이나 의병을 평가절하하는 이유의 하나이다.


식민지화 십여 년 만에 농업에서 근대화 이룩?


그리고 이들은 일제가 1910년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한 결과 불과 십여 년 만에 농업에서 엄청난 근대화를 이룩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의 결과 1910년 후반에 비해 1930년대 연평균 쌀 생산량은 700만석가량 증가했는데, 그 가운데 570만석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조선인의 소득이 증대했다는 것이다.


“산미증식계획의 결과 수리시설을 갖춘 논이 증가하였다. …… 1910년 후반에 비해 1930년대 연평균 쌀 생산량은 700만석가량 증가했는데, 그 가운데 570만석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 농민과 지주들은 다른 농사보다 수익성이 좋은 쌀농사에 주력하였다.”(『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98쪽)


“쌀은 일본에 수탈된 것이 아니라 경제 논리에 따라 일본에 수출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인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소득은 증가하였다. 쌀을 대신해서 만주에서 조와 콩이 대용 식품으로 수입되었다. 쌀의 1인당 소비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잡곡 등 대용 식품과 기타 가공 식품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1인당 열량 섭취가 줄어들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 엥겔계수도 하락하여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개선되었음을 시사하고 …… 한국인들의 키가 1~2cm 커진 것도 생활 수준의 개선을 의미한다.”(『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98쪽. 이 내용은 뉴라이트가 만든 2013년도 교학사 판 『고등학교 한국사』에 거의 그대로 실렸다.)


한마디로 일제의 수리조사사업과 농업개발 정책에 힘입어 수출(정확하게는 이출이란 용어가 맞다-인용자)이 늘어 소득이 증대했다는 것이다. 이 결과 한국인의 생활 수준과 건강 상태도 향상되었다고 한다.


일제의 농업 개발 결실은 일본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첫째, “1910년 후반에 비해 1930년대 연평균 쌀 생산량은 700만석가량 증가했는데, 그 가운데 570만석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는 이들의 주장은 통계와 맞지 않다. 박찬승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1930~1932년 쌀의 연평균 이출액은 800만석 이상이었다. 또 1930~1935년 연평균 쌀 생산량은 700만석이 증가한 게 아니라 약 372만석이 증가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 경우 증산이 372만석인데, 800만석 정도가 일본에 이출된 것이니, 약 430만석이 추가로 일본으로 유출된 것이다. 쌀의 증산 분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미곡이 일본으로 이출되어, 이 때문에 조선에서 쌀 부족 현상이 일어났다. 이 시기 조선인 1인당 쌀 소비량은 일본인 1인당 소비량의 절반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부랴부랴 만주의 잡곡을 수입해 쌀 부족에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뉴라이트들은 혼식 덕에 키가 커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건강혼식’이 아니라 ‘기아혼식’이었다.


둘째,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을 위한 정부라면 조선인을 굶기면서 연평균(1930~1934) 쌀의 생산량의 40퍼센트를 기아(飢餓) 이출할 리 있겠는가. 조선총독부는 일본 본국의 미곡 안정을 위한 희생양으로 이런 기형적인 이출을 용인하고 장려한 것이다. 그것이 제국주의와 식민지 사이의 ‘수탈’의 본질이다. 수탈이 정책이나 법적 강제 또는 공권력의 강압적 집행 등에 의해 가려졌을 뿐이다. 마적 따위의 ‘원시적 수탈’이 아니라 발달한 국가기구를 매개로 한 제국주의 본국의 ‘구조적 수탈’이었다.


셋째, 산미증식계획과 일본으로의 쌀 이출로 이익을 본 자들은 일본인 대지주와 소수의 조선인 지주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 입에 풀칠하기 바쁜 소농들이나 영세 소작농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었겠는가? 특히 쌀이 일본으로 대량 이출되자, 이익에 눈먼 대지주들은 50~60퍼센트—극단적인 곳은 80퍼센트의 고율 소작료를 징수했다. 이 때문에 조선 농민의 70~80퍼센트에 해당하는 소작농—자소작농 포함—은 절대 굶주림에 시달렸고, 소작쟁의가 폭증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1920년부터 1939년까지 20년간 소작쟁의 건수는 14만969회로 나타났다. 그리고 농촌을 떠나는 유랑민들이 1925년 한 해만 해도 조선총독부 공식 통계만으로 15만5112명에 이른다. 1930년 거지의 수효는 5만8204명에 이르렀다. 이것이 산미증식계획이 빚은 실체이다.


넷째 산미증식계획의 핵심 사업인 수리조합설치사업(1921~1934년) 과정에서 과다한 공사비와 수세(水稅) 부담으로 조선인 중·소 자작농과 자소작농이 몰락하고, 수리조합 구역 내의 소작료 인상과 지주의 수세 및 공사비의 전가로 전국에서 수리조합반대투쟁이 일어났다. 수리조합반대투쟁은 시행 초기부터 일어나 사업 종료 시점인 1934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결과 일본인 소유의 경지면적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1910~1935년간에 일본인 소유 경지면적은 6만9천정보에서 45만2천정보로 6.5배로 늘어났고, 논의 면적은 4만3천정보에서 31만2천정보로 7.3배, 밭의 면적은 2만7천정보에서 14만정보로 5.2배 늘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의 경지면적은 거의 변하지 않았는데, 일본인 소유지의 급증은 조선의 경지에서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1.6%에서 10.2%로 증대되었다. 특히 논의 경우에는 그 비중이 2.8%에서 18.3%로 크게 늘어났다. 조선의 논의 1/5가량이 일본인 소유로 되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일본인 농업인구는 조선 전체의 농업인구의 0.2%에 불과했지만, 1941년 조선의 농업수입의 15.1%를 차지했다.

그런데 조선인 농민의 경우 자소작농층이 몰락하고 그 결과 소작농층이 크게 늘었다. 1915~1932년 사이 17년 만에 자소작농 호수는 100만호에서 70만호로 31%가 감소했다. 소작농 호수는 100만호에서 150만호로 64% 증가해, 전체 농가의 53%가 소작농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식민지 농업근대화에 가려진 농민의 실상이다. 일제의 농업 개발의 결실은 오로지 일본인에게 돌아간 것이다.(계속)

     

조선총독부의 '저미가정책'으로 대부분이 소작농이었던 조선인은 8할까지 소작료를 내야 했고, 일제는 상인들을 앞세워 조선에서 생산되는 거의 전량의 쌀을 헐값으로 사들여 군량미로 사용했다. 1920년대 소작쟁의의 본질은 수탈에 대한 농민들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한 생존 투쟁이었다. 사진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쌓여 있는 쌀가마니들이다.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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