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내 일본인이 공장 자본액의 90% 차지하고, 1945년 1인당 GDP가 1911년보다 더 낮아졌으며, 해방 후 남은 공장들이 극히 적었음 등을 밝혀,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이 허구임을 말한다
2024-11-21 박한용
박한용 | 역사평론가, 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제강점기 반제동맹 조직운동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순천향대·한성대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대학원 강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교육홍보실장 등을 거쳤다. 주요 논저로 「1920년대 후반 국제반제동맹의 출범과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대응」, 『일제강점기 친일세력 연구』(공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공저),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변준호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영주독립운동사』(공저), 『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 역사 1, 2』(공저) 등 다수가 있다.
공업화로 조선인도 혜택, 해방 후 산업화의 자양분?
뉴라이트의 공업에서의 식민지근대화론은 어떠한가? 안병직·이영훈 등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공장 수가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인 공장 수를 능가하고 조선인 회사 수도 빠르게 증가해 일본인 공장과의 격차가 좁혀져서 조선인도 조선 공업화의 혜택을 입었고 이 경험이 해방 후 산업화의 자양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조선 내 극소수 일본인들의 공장 자본액이 90% 차지
그러나 정태헌 교수에 따르면 이 설명 또한 실제 역사상을 왜곡하고 있다. 먼저 공업부문에서 자본액을 살펴보자. 1920년부터 1940년까지 회사 납입 자본액은 10배 가까이 증가했다(1억 8000만여엔→16억여엔). 이 자본액의 증가는 전체의 80%를 점하는 광공업 회사의 자본액이 급증했기 때문이다(3000만여엔→11억여엔). 그런데 1926~1939년 공업 생산액이 5억여엔에서 18억여엔으로 증가했는데, 회사 납입 자본액 가운데 조선인 자본의 비중은 10% 남짓했다. 이조차도 1941년에는 8.5%, 해방 당시에는 7.4%로 줄었다.
공장수로는 일본인 공장이 10% 정도였는데, 자본액은 90%를 차지하고, 전체 공장수의 90%를 차지하던 조선인의 자본액은 고작 10%에도 지나지 않았다. 조선 내 극소수의 일본인들이 회사 자본액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을 근대화 또는 경제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조선인 자본은 노동집약적 일상품 생산 영세기업
조선인 자본의 성격도 문제이다. 1939년 조선인 공장 생산액(가내수공업 제외)을 살펴보면 정미업(41.8%), 양조업(11.8%), 동물유지제조업(9.5%)으로, 이 3개 업종이 63.1%나 차지하고 있다. 정미업과 양조업은 전통적 소비재 업종으로, 뉴라이트가 조선공업화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자본, 기술, 노동력이 필수적인 중화학 공업과의 산업 연관은 없었다. 조선인 자본은 조선인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노동집약적 틈새 부문에서 영세기업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 투자된 자본은 대부분 일본 자본이었으며, 조선 경제의 수익은 대부분 일본 자본과 재조선 일본인의 몫이었다. 1930년대 조선에 들어선 공장은 한반도까지 포괄하는 ‘일본 자본주의’ 경제권 안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었지, 한반도 경제권 안에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한반도 경제라는 것은 독자적인 경제권이 아니었다. 따라서 한반도만의 경제성장률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박찬승).
1910년~1940년 동안, 한반도의 총소득이 2.7배 커졌다?
그럼에도 뉴라이트 학자들은 국내총생산(GDP) 추계를 실증의 지표로 내세우며 일제가 식민 통치를 개시한 1910년대부터 조선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보았다. 그 결과 “전체적으로 식민지 한국의 연평균 총생산은 인구 성장률 1.3%를 능가하는 3.6%의 성장을 보였”고(대안교과서, 99쪽; 안병직·이영훈 대담집 『대한민국 기로에 서다』, 142쪽), ‘연간 2.3%의 실질 성장률에 따라 식민지기에 1910년~1940년 동안 한반도의 총소득이 2.7배나 커졌다’라고 한다(안병직·이영훈 대담집 『대한민국 기로에 서다』 142쪽).
그러나 이것도 틀렸다. 왜냐하면 이 통계에는 교묘한 트릭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작고한 허수열(전 충남대 교수), 정태헌(전 고려대 교수)의 예리한 비판이 있다.
1910년대 초의 농업생산액을 매우 낮추어 추계한 오류
먼저 농업부문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적인 주장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한 직후 약 10년간(1911~1918년)의 농업생산이 1918~1929년에 비해 빠르게 증가했다는 것이다(김낙년 엮음,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의 조선의 국내총생산GDP 추계).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통계 조사는 1917년부터 시작했다. 따라서 1910년대 통계는 토지면적과 인구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데, 그 위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이 제대로 따져졌을 리가 없다. 1911~18년의 농업의 변화 양상은 1918~29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한제국 시기나 1910년대 초의 농업생산액을 매우 낮추어 추계함으로써 1910년대 중후반으로 가면서 그래프가 상승하도록 한 셈이다. 결국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통계 분석은 그 근본인 1910년대부터 잘못되었다(허수열).
패망기인 1941~1945년의 통계는 제외
두 번째로 1910년에서 1940년의 기간의 통계만 다룸으로써 1940~1945년 몰락의 시기를 빼고 발전하는 시기만 딱 떼어놓고 ‘발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10년대와 1941~1945년 사이 두 구간의 통계가 다 부실함에도, 이영훈 등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일제 패망기 1941~1945년 사이의 통계는 사용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1910년대의 통계는 사용하고 있다(허수열). 특히 1938년부터 1945년 시기는 인력, 물자, 자금 등 각종 자원을 극한적으로 동원한 이른바 전시총동원시기이다. 1940년대 들어서면 공장의 생산성과 노동 생산성이 마이너스 성장으로 역전되었다. 특히 연합군 해상 봉쇄로 물자 수송이 두절되는 1943년 이후에는 모든 부문에 걸쳐 생산액 자체가 격감했다(정태헌). 여기에 인력 수탈, 자원 수탈, 공출 등 극한의 ‘고혈 뽑기’는 식민지 한국인의 삶을 극한으로 치닫게 했다. 왜 뉴라이트들은 이 시기를 통계에서 제외했는가?
1인당 GDP는 회귀: 777달러(1911년), 1482달러(1937년), 616달러(1945년)
세 번째로 안병직과 이영훈은 연평균(1910~1940년) 경제성장률을 3.6%로 파악하고 같은 기간 인구증가율을 연간 1.3%로 보아 실질소득이 연간 2.3% 수준으로 증가하고 이에 따라 한반도의 총소득이 2.7배나 커졌다고 했다. 이 성장지표도 수긍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김기협은 인구증가율이 1.3%가 아니라 2.3%가 실제에 가깝다는 입장에서 이에 따른 실질성장률을 연평균 1.3%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건 “현금 지출이 늘어나는 ‘근대화’ 과정 속에서 총체적으로 비참한 상황에 틀림없”는 것이라고 했다(김기협,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란 무엇인가?”, 프레시안 2008년 8월 18일).
허수열 또한 앞서 1910년대 초의 GDP추계를 이영훈 등이 과소평가하고 1940~1945년 몰락의 통계를 누락시킴으로써 마치 성장의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또 뉴라이트도 종종 활용하는 앙구스 메디슨의 역사적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GDP 그래프를 본다면 1910년부터 시작해서 1930년대까지는 1인당 GDP가 증가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1인당 총생산은 1911년(777달러)을 지나 1937년(1482달러)에 정점을 찍은 후 감소 추세로 반전되어 1945년(616달러)에는 일제 시기 이전으로 회귀된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해방과 더불어 조선 공업화의 기반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의 하나로 전락해 있었다(정태헌, 허수열). 1950년의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770달러로 메디슨의 자료에 나오는 145개국 중에서 106번째에 지나지 않은 것도 이를 방증한다(허수열).
일제강점기, 근대적 경제성장은 없었다
허수열 교수는 무엇보다 사이먼 구츠네츠의 근대적 경제성장의 정의에 따른 한국의 1인당 GDP 그래프(미조구치와 메디슨)를 본다면 일제 최종기의 1인당 GDP는 일제 초기의 GDP를 넘어서기 어려운 것을 그래프로 알기 쉽게 보여 주고 있다(<표> 참조).
“적어도 사이먼 쿠즈네츠의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본다면, 한국에서의 근대적 경제성장은 60년대 후반입니다. 물론 경제적인 변화만으로 그 시절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제3공화국 시절은 인권과 민주화에 있어서 여러 가지 부정적 문제가 분명 존재합니다. 또 소유구조 불평등과 소득 분배의 문제가 있지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의 근대적 경제성장은 일제시대에서는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허수열)
1938년 공장들 중 1949년까지 존재한 것은 고작 6.8%
실상이 이러하니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가 해방 후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성장에 중요 기반이 되었다는 뉴라이트의 주장도 당연히 맞지 않다. 정태헌 교수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우선 해방 후 경제 재건에서 일제하 기업 경험의 역할도 제한적이었다. 1930년에 존재한 공장 가운데 1938년까지 존속한 것은 22.8%에 지나지 않았고, 1938년에 존재한 공장 가운데 1949년까지 존재한 것은 고작 6.8%였다.
자원의 총체적 고갈은 해방 후 경제 재건에 장애 요인
일본은 전시경제하에 배양한 자동차 기술로 패전 후 경제성장의 디딤돌이라도 만들었지만, 조선 사회가 보유한 각종 자원을 총체적으로 고갈시킨 조선 공업화는 해방 후 평화산업으로의 전환과 경제 재건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단순 노무직에 집중된 식민지 고용구조 때문에 기술 이전 효과도 논하기 어렵다. 가령 철도 종사원의 경우 조선인은 단순 실무에 집중되어 해방 후 철도 운영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조선 사회가 보유한 각종 자원을 총체적으로 고갈시킨 조선 공업화는 해방 후 평화산업으로의 전환과 경제 재건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1949년 8할이 1차 산업에 종사, 일본의 1887년 산업별 인구 구성과 비슷
1949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전체 유업자의 78.85%가 농업에 종사했는데, 여기에 수산업을 더하면 전체 유업자의 8할이 제1차 산업에 종사했다. 공업개발이 아직 본격화되지 않았던 1930년 무렵의 비율과 비슷하고 민망하게도 일본의 1887년 산업별 인구 구성과 비슷했다.
일제의 물적 인프라가 철저히 파괴된, 북한에서의 경제성장이란 모순
여기에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1960년대까지 북한의 경제성장이 남한의 그것보다 앞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한은 일제가 중화학공업을 육성시킨 지역이었다. 그러나 6·25 전쟁 기간 미군의 폭격에 의해 북한 지역의 대부분의 생산시설이 파괴되었다. 평양의 경우 대동강변의 을밀대만 멀쩡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이다. 일제가 구축한 물적 인프라스트럭처가 사라졌음에도 북한의 경제성장이 남한의 그것보다 앞섰다는 것이야말로 일제의 식민지근대화론이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독립운동을 역사에서 배제하다
사실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은 색다른 주장이 아니다. 안병직·이영훈 등은 직접적으로는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 일본인 학자의 이론을 이어받은 것이다. 또 에커트(Cater J.Eckert), 맥나마라(Dennis L. McNamara), 거센크론(Alexander Gerschenkron) 등 일군의 서구 학자들이 한국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의 역사적 기원을 일제 식민지 경험에서 찾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한국의 뉴라이트는 빗나가도 너무 빗나갔다. 뉴라이트 학자들은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창하더라도 그 부정적 유산을 동시에 포착하려는 해외 학자들보다도 달리 일제가 준 근대화라는 축복에 열광하고 있다. 나아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놀라운 번영’ 또는 ‘성공 신화’의 역사적 기반을 일제 식민지 시기로 보고 있는 이상, 일제강점기에 대한 뉴라이트의 관심은 자연 일제가 얼마나 식민지를 개발시키고 한국인을 문명화시켰는가 하는 점이 주된 관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역사는, 독립운동사는 이들의 역사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고 조선총독부나 일본인 지주나 일본인 기업 그리고 여기에 영합한 친일파가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독립운동가가 철도나 도로를 놓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뉴라이트 이론의 맹주라 할 모교수는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재직할 당시 저명한 유림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 학술상(심산상) 수상식에 동료 교수로부터 참석을 권유받은 바 있다. 이때 그는 참석을 거부하면서 했다는 말을 필자는 그 동료 교수를 통해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심산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무슨 기여를 했습니까?”
여기에 한국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의 정수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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