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형의 에너지 꽈당 | ① 탈원전 vs 에너지 전환, 이분법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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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25 이순형
한국의 에너지 정책이 '탈원전이냐 친원전이냐'란 이분법에 갇혀 있다.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가 아니라 생산지에서 소비지로 어떻게 송전할 것인가, 즉 에너지 계통망을 설계하는 일이 시급하다. 호남에서 남아도는 에너지가 수도권으로, 영남으로 갈 수 없어서 전력 생산을 중단해야 하는 '출력제한'이 되고 있다. 에너지 전환은 정치 구호가 아니라 시스템과 과학과 기술이 기반해서 설계부터 해야 한다.

이순형 교수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대학원에서 에너지안전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동신대학교 전기공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인 전기기술사이다. 전력계통 운영과 신재생에너지 접속 문제, 분산형 전원 기술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주도해 왔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 과제인 ‘영농형 태양광 발전 표준모델 실증’ 연구의 책임자로서 농촌 기반 에너지 전환의 현장 모델을 설계했다. 2020년 은탑산업훈장, 2024년 전라남도지사 표창과 대한전기학회 춘계학술대회 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대표 강의는 ‘전력계통’, ‘에너지변환공학’, ‘신재생에너지공학’ 등이며, 저서로는 『신재생에너지공학』과 『계통연계기술』 등이 있다. 전라남도 정책자문위원회 전략산업분과 위원으로도 활동하며, 지역 기반 에너지 정책의 실용화와 대중 소통에 적극 나서고 있다.
에너지 정책은 정치 구호가 되었다
한국의 에너지 정책은 늘 정치적 프레임에 갇혀 있다. '탈원전이냐, 친원전이냐'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모든 것을 가른다. 하지만 나는 이 구조가 완전히 잘못됐다고 본다. 에너지 전환은 원전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본질이 아니다. 에너지 전환은 2060년, 2080년까지 장기적으로 시뮬레이션이 필요한 과학의 문제다. 에너지는 과학이고, 시스템이고, 공학이고, 기술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에너지 정책은 정치 구호가 되어 버렸다.
기후변화는 이미 진행 중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에너지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핵심이다. 이건 단기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문제다. 수십 년에 걸친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데 에너지 정책은 늘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린다. 매번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책이 전면 수정된다. 이건 국가 시스템이 아니다. 과학의 문제를 정치가 좌우해서는 안 된다. 정권마다 다르게 말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권은 5년을 보지만, 에너지는 50년을 봐야 한다.
지금의 정책 프레임은 너무 단순하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예를 들어 원전을 없애자고 하면 곧바로 친환경인 것처럼 말한다. 반대로 원전을 유지하자고 하면 마치 기후를 무시하는 것처럼 몰아간다. 이런 식의 흑백 논리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어떤 에너지 믹스를 가져갈 것인가’, ‘기술적·경제적으로 어떤 시스템이 지속 가능한가’다. 단순한 구호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구호가 정책이 되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구호가 정책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탈원전', '탄소중립', '에너지 전환', 다 좋은 말들이다. 그런데 이 구호들이 과학적 검토 없이 무조건 실행되면서 문제가 생긴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은 반드시 실패한다. 실제로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은 복잡하다. 예컨대 계통망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생에너지를 무작정 확대하면 출력제한이 발생한다. 이건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도 정책은 늘 구호를 앞세운다. 이런 방식으로는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만들 수 없다.
정책 결정 과정도 문제다. 에너지 전환은 기술자, 과학자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전기와 계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책을 주도해 왔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환경단체가 정책을 끌고 갔다. 기술자들은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없었다. 과학적 검토가 빠진 상태에서 정책이 만들어지니, 당연히 현장에서 문제들이 터진다.
'어떻게 설계할 것이냐'가 문제
나는 '탈원전 vs 친원전'이라는 이분법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본다. 에너지 전환을 둘러싼 논쟁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긴 안목을 필요로 한다. 원전도 하나의 옵션일 수 있고, 재생에너지도 중요한 축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전체 시스템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이다. '무엇을 할 거냐, 말 거냐'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설계할 것이냐'의 문제다.
정책은 기술적 현실 위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기후변화 대응, 지속가능한 성장, 에너지 안보, 이런 요소들이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정치적 구호는 그 모든 요소들을 무시한다. 나는 이 점을 가장 우려한다. 과학이 아닌 정치가 정책을 좌우하면, 그 결과는 결국 국민이 감당하게 된다. 전기 요금이 오르고, 에너지 불균형이 생기고, 지역 간 갈등이 생긴다. 시스템은 점점 불안정해진다.
에너지 정책은 국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다. 단순한 정치 쟁점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기후변화는 앞으로 수십 년간 우리가 계속 싸워야 할 과제다. 그 싸움을 감당하려면 과학적 기반 위에 세운 일관된 정책이 필요하다. 기술자, 과학자, 현장의 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에너지 전환은 ‘탈원전이냐, 친원전이냐’로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건 하나의 작은 선택지일 뿐이다. 우리는 더 큰 틀에서, 더 긴 호흡으로, 더 복잡한 요소들을 고려해서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과학과 기술 위에 세운 철학이다.
송전이 막혀, 전기를 보낼 고속도로가 없다
호남 지역의 출력제한 문제는 지금 한국 에너지 전환 정책의 실패를 그대로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이름 아래 재생에너지를 무작정 확대했지만, 그 전기를 보낼 길이 없다. 발전소는 세워 놓고, 전기를 생산해도 못 보낸다. 결국, 송전이 막히면 발전기를 꺼야 한다. 이게 지금 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호남은 전기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지역 중 하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전기를 가장 적게 쓰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전기는 많은데, 수요가 없다. 게다가 송전망도 없다. 이게 바로 출력제한이다. 계통 포화다. 전기를 만들어도 보낼 수 없기 때문에 발전기 출력을 낮추거나 꺼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구체적인 수치를 보자. 광주의 에너지 자급률은 9.3%다. 반면 전남은 198.9%다. 이건 무슨 뜻이냐면, 전남은 자기 수요의 두 배에 가까운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광주는 자기 전기의 10%도 못 만든다. 이런 불균형한 구조에서 전남이 만든 전기를 광주로, 그리고 수도권으로 보내야 하는데, 그 통로가 없다. 호남에서 수도권으로 가는 송전선은 고작 두 줄이다. 여기에 더 이상 전기를 실을 수 없으니, 결국은 생산된 전기를 그냥 버리는 셈이 된다.
계통망 설계 없이 재생에너지를 늘리면, 출력제한이 생긴다
이 문제는 단순히 지역 간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에너지 정책이 기술을 무시하고 구호만 앞세우다 보니, 이렇게 전력 시스템 전반에 왜곡이 생긴 것이다.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방향 자체는 맞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 어떻게 하느냐다. 계통망 설계 없이 재생에너지를 늘리면 필연적으로 출력제한이 생긴다. 그리고 지금 그게 현실이 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출력제한이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전이 접속을 못 해줘서 발전사업자들이 몇 년씩 기다리고 있다. 신재생을 설치하면 5~6년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새로 태양광을 깔아도, 바람이 불어 풍력이 돌아도, 그 전기를 보낼 길이 없으니 무용지물이다. 그야말로 에너지 블랙홀이다. 기술이 아닌 정책 설계의 실패다.
나는 이 상황을 두고 '정책 실패의 민낯'이라고 본다. 에너지를 전환하겠다고 하면서, 정작 송전과 수요, 계통망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지 않았다. 송전망이 없으면 발전을 못 한다. 이건 전기공학의 상식이다. 그런데 그런 기본도 무시한 채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구호만 반복됐다. 그 결과가 바로 호남의 출력제한이다.
생산지와 소비지를 잇는 계통망, 그 사이 수요처 설계가 관건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역별 특성과 수요-공급의 균형, 그리고 계통망의 설계를 다시 짜야 한다. 단순히 송전선을 더 놓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 정부는 송전선에만 58조 원을 쏟겠다고 하는데, 나는 방향이 잘못됐다고 본다. 송전선만 늘리는 게 답이 아니다. 무효전력 보상장치나 ESS 같은 기술을 활용해서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더 효율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 기반의 시스템 설계다. 발전이 아니라 송전이 관건이다. 생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할 수 있는 계통망, 그리고 그 사이의 수요처 설계가 중요하다. 그래야 출력제한을 해결할 수 있다. 에너지 전환은 단순한 발전소 건설이 아니라, 전체 시스템을 새로 설계하는 일이다. 기술적 검토와 시뮬레이션 없이 진행된 정책은 결국 현장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호남의 출력제한은 단지 지역 문제가 아니다. 한국 에너지 정책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는 구조적 문제다. 구호가 아니라 시스템이, 정치가 아니라 과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호남'이 계속 생겨날 것이다. 이 문제를 외면한 채 에너지 전환은 없다. 전환은 말이 아니라, 설계로 하는 것이다.
이분 대단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