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희 2024-10-04
박진희
로컬의 지속가능성 활동가
(재)장수군애향교육진흥재단 사무국장
초록누리 협동조합의 이사장 역임
한국농어민신문, [박진희의 먹거리 정의 이야기] 연재
배추가 줄지은 산에 가면
지금은 산자락에 살아서 산에 대한 열망이 없지만, 한때는 산에 오르는 걸 기꺼이 즐겨하며 살았다. 서울에 산 세월이 길어 주로는 서울의 산을 올랐지만, 전국 어디의 산이라도 누가 같이 오르자고 하면 기꺼이 길을 나섰다. 강원도 평창이 고향인 남편과 연애하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강원도의 산을 자주 올랐다. 소금강의 찬란한 아름다움도, 한여름 태백의 청량한 시원함도 강원도 산을 오르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인생의 풍요였다. 그렇게 강원도의 산을 다니다가 숲과 바위의 산이 아닌 배추로 줄지어선 산을 만나게 되었다, 강원도 하면 ‘감자’와 ‘옥수수’만 떠올렸는데, 강원도 산 중의 배추라니! 산에서 만나는 배추밭은 묘하게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아름다웠다. 농사를 전혀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던 터라, 산에서의 농사가 가능하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마치 지리산에서 다락논을 마주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백두대간 산자락에 다락논, 화전밭, 배추밭
기실 한국은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산을 만날 수 있고, 전국 어디에나 명산이라 불리는 산들이 있다. 한국의 산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금강산, 설악산, 소백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렇게 잇고 이어진 한국의 산자락을 백두대간이라고 부른다. 한국은 다문화사회가 되었으므로 민족의 개념을 앞세우는 일이 덜해졌지만, 우리는 백두대간을 민족의 자부심, 민족의 기상으로 여겨 왔고 백두대간을 해치는 일을 민족의 기운을 해하는 일로 여겨 왔다. 백두대간 산자락은 험준해서 지근거리에 사람들의 삶을 허락할 것 같지 않지만, 백두대간 산자락은 다락논이 만들어지고, 화전밭이 되고, 배추밭이 되어 사람들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산을 층층이 계단으로 만들어 논을 일구고, 배추밭으로 일구는 삶. 생존을 위한 치열함과 삶의 기술이 호미와 낫을 타고 펼쳐진 세상은 사람들에게 산을 달리 보는 재미와 탄성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백두대간의 논과 밭을 백두대간이 품어준 삶의 풍경으로만 이해해도 좋을까?
다락논 농사와 다른, 배추밭 농사
숲으로 가득 찬 산은 지구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일등 공신이다, 생물다양성의 보고이고, 지구의 기후를 조절할 수 있는 허파이고, 토양의 침식을 막고 홍수를 막을 수 있는 대들보이다. 백두대간에서 하는 다락논 농사는 물을 가두는 논의 특성상 홍수를 막고, 논의 생물다양성에 기여하며, 계절에 따른 풍광으로 산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농사가 중지된 묵 논은 습지의 기능을 하며, 자연스럽게 다시 생태 자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백두대간 배추밭 농사는 다르다. 토양의 유실, 산사태, 농약 살포에 따른 생물종 훼손과 같은 환경적 문제가 발생한다. 백두대간에서의 고랭지 농업 환경 조성이 확대된 것은 농부들이 시작한 게 아니다. 전쟁과 땔감을 마련하기 위한 무분별한 벌목으로 산림 훼손이 심각해지자 산림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무를 심는 것과 더불어 배추밭을 조성했고, 이것이 확대되어 고랭지 농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일교차가 크고, 강수량이 풍부한 고랭지에서의 배추 등 냉한 작물 농사는 농업적 관점에서 분명 이득이 된다.
백두대간은 고랭지 농업의 최적지가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백두대간 생태계 파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기후위기 시대가 도래했으므로 작물의 최적 재배지가 모두 변하는 상황에서 고랭지 농업이 대안이 될 수 있지 않냐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백두대간은 산림 최적화 지역으로 산림을 통해 기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최적화되어야 할 공간이지 농업 최적화 공간이 될 수는 없다. 고랭지 배추밭 농사가 기후위기로 심각해졌다는 소식이 이미 일상적인 뉴스가 된 것만 보아도 고랭지 농업이 기후위기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고랭지 농업을 생업으로 해 온 농부들이 소득이 보전된 상태에서 백두대간 외 장소로 농업을 이전하고, 백두대간을 보호할 수 있는 정부의 제도적인 적극적 조치가 필요하다. 그게 고랭지 배추 농업의 역사를 만든 정부의 책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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