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삶이 절실한 시대, 장수 할머니들의 생태적 살림의 지혜를 배우는 '장수발효연구회'
박진희 2024-10-31
박진희
로컬의 지속가능성 활동가
(재)장수군애향교육진흥재단 사무국장
초록누리 협동조합의 이사장 역임
한국농어민신문, [박진희의 먹거리 정의 이야기] 연재
어르신들의 장 담그는 노하우를 찾아서
전북 장수에서 뜻이 맞는 사람들이 장수발효연구회를 만들었다. 기쁜 마음으로 이런 일 저런 일을 함께하고 있다. 한끼 밥상을 차리면, 상차림의 어딘가에는 발효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일상 가까이 있는 발효는 어느 날 뚝딱하고 만들어진 것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장수발효연구회는 직접 장을 담고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성성한 백발, 구부러진 허리,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발효를 이어온 지역 할머니들은 콤콤한 냄새가 퍼지고 있는 청국장을 보여주시기도, 높이 매달린 메주를 안내해주시기도, 항아리를 열고 장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고추장 담는 방법이 달랐다
할머니들은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 담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그중 고추장 담는 법이 여느 지역과 달랐다. 통상 고추장은 찹쌀과 같은 전분질에 엿기름물을 섞어 삭힌 뒤 달여 조청으로 만들고, 여기에 고춧가루와 메줏가루를 섞고, 소금이나 간장으로 간을 맞추어 담아 먹는다. 조청은 주로 찹쌀로 만드는데 멥쌀, 보리, 수수 등의 잡곡류와 고구마를 쓰기도 한다. 어떤 조청을 사용했는지에 따라 찹쌀고추장, 보리고추장, 수수고추장처럼 고추장 이름을 달리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인터뷰에 응해주신 어르신 중에 감자로 조청을 만들어 고추장을 담은 친정어머니를 그리워하셨던 분이 계셨다. 그리고 감자조청으로도 담고, 생각을 해보니 옥수수로도 될 것 같아서 옥수수조청을 만들어 고추장을 담았다는 분도 계셨다.
고구마고추장, 감자고추장, 수수고추장, 옥수수고추장
“우리 엄마는 고구마고추장은 담지 않으시고, 꼭 감자고추장만 담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엄마는 왜 감자고추장만 담아? 저기 순영이네 집은 고구마고추장만 담던데’하고 물은 적도 있어요. 수수고추장을 또 쌀 대신에 수수밥으로 담기도 했는데 맛있었어요.”
“재작년에는 감자를 잘라 넣었지. 감자를 캐고 나면 잔챙이가 많이 있고 버리기가 아깝잖아. 그러면 씻어서 삶아서 으깨. 그래서 엿기름을 사서 담아요. 작년에는 옥수수를 불려서 조청을 만들어 고추장을 담았어요”
할머니들이 들려주신 생생한 이야기이다. 감자 조청을 어떻게 담느냐고 여쭈었더니 감자를 삶아 멥쌀, 찹쌀과 함께 조청을 만든다고 하셨다.
고랭지 산간에는 작은 감자도 아까워서
지역의 음식은 기후, 지리 등 환경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백두대간 금남호남정맥이 이어지는 장수군은 고랭지 산간 지역으로 겨울이 길고 춥고, 논은 적다. 화전민의 생활 터전이 되었던 골짜기도 많다. 논이 적어 쌀은 귀하고, 거름이 풍족하지 않아 작은 감자는 많이 나오는 장수에서, 저장기술은 떨어지니 감자를 오래 두고 먹을 수는 없던 시절. 쌀은 아끼고, 작은 감자도 알뜰하게 사용하려고 조청을 만들고 고추장을 담으셨다는 설명이다. 발효연구회 회원들은 감자고추장 시연을 보기도 하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감자조청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장수라는 환경 조건에서 만들어진 감자고추장을 통해 전통의 맛, 지역의 정체성, 장수에서 많이 심어온 홍감자로 감자조청을 만들어 생물다양성까지 생각할 수 있는 교육 계획안을 마련해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할머니들의 ‘요리가무’
슬로청춘이라는 그룹이 있다. 슬로푸드 정신에 동의하는 청년들이 ‘요리가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버려질 뻔한 음식을 흥겹게 나누며, 음식이 허투루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캠페인을 하고 있다. 수십 년 전부터 장수의 할머니들은 조청을 쑤고, 장을 담으며 특별히 무어라 정의하지 않았어도 슬로푸드 정신으로 요리가무를 해온 셈이다. 슬로푸드 시니어인 할머니들의 생태적 살림의 지혜를 우리와 그리고 다음 세대로 이어가는 일, 생태적 삶이 절실한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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