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를 포함한 여러 요인으로 쌀 부족 위기에 직면한 일본의 사례를 들어, 쌀이 국민의 주식이므로 정부가 쌀 비축을 통해 공공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양곡관리법 시행을 촉구한다.
박진희 2024-12-26
박진희
로컬의 지속가능성 활동가
(재)장수군애향교육진흥재단 사무국장
초록누리 협동조합의 이사장 역임
한국농어민신문, [박진희의 먹거리 정의 이야기] 연재
밥 소믈리에
설마 하는 분들도 계실 테지만, 와인 소믈리에가 있는 것처럼 ‘밥 소믈리에’가 있다. ‘밥 소믈리에’는 밥의 주원료인 쌀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과 밥 짓는 조리 과정에서 필요한 기술과 밥의 영양학적 가치 등을 잘 알고, 맛있는 밥을 구분하는 관능평가를 수행하는 전문가이다. 일본의 취반협회에서 자격 시험을 주관하고 있는데, 이런 자격증 제도가 있을 만큼 식사에 있어 일본이 밥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기도 하다.
주먹밥협회
그러나 일본 역시 우리나라처럼 쌀 생산량과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다. 1961년 일본 국민은 한 명당 연간 118㎏의 쌀을 소비했으나, 2020년 소비량은 50.8㎏으로 6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쌀 소비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쌀 생산량 역시 1960년에는 약 1,285만톤이었는데, 2020년에는 776만톤으로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일본의 농림수산성과 민간단체들은 쌀 소비량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쌀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맞추고, 쌀의 수출을 늘리고, 오니기리협회(주먹밥협회)를 통한 다양한 주먹밥 소비 진작 활동, 쌀가루 활용도 높이기 등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레이와 쌀 소동
그러나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쌀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22년 대비 2023년 쌀 생산면적이 0.7% 감소했지만, 폭염 등의 피해로 쌀 생산량이 1.3% 줄어든 것이다. 그리고 2024년 여름, 쌀 부족 현상으로 수퍼마켓 매대에서 쌀이 보이는 대로 사라지는 ‘레이와(令和) 쌀 소동’이 일어났다. 기후위기로 쌀의 품질이 떨어져서 쌀 확보를 제대로 하기 어려워질 것을 우려한 양곡 회사들이 쌀을 사들이고, 엔저로 일본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외식산업의 쌀 소비량이 급증하고, 우크라이나 등의 전쟁으로 밀가루 가격이 올라가고, 쌀가루 소비 증진 활동이 일어나면서 쌀의 소비량이 증가하는 등의 조건이 맞물리며, 쌀 품귀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수퍼마켓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본의 편의점 인기 품목 상위권도 쌀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일본의 사례는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양곡소비량 조사 표본수는 0.01% 가구
우리나라는 1962년 농림부 양정국에서 양곡소비량 조사를 시작했고, 농업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통계 조사 중 하나가 되었다. 밥심으로 사는 대한민국 국민의 양곡소비량 조사이고, 정부의 통계조사이니 표본수가 엄청나게 많을 것 같지만, 양곡소비량조사의 가구부문 조사는 2023년 기준 총1400가구(비농가 900가구, 농가 500가구로 구성)를 대상으로 이뤄지고 있다. 전국 가구수가 2200여만 가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표본수가 0.01% 수준으로, 정확한 통계 조사로 볼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의 표본수이다. 그런데 이 표본수의 조사를 들어 정부는 쌀 소비량이 큰 폭으로 해마다 감소하고 있음에도 쌀이 과잉생산된다는 논리를 만들어 몇십년째 고수하고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은 양곡관리법에 거부권 행사
올해 전국의 논은 창궐하는 벼멸구로 쌀 생산량이 전년대비 3% 이상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후위기로 쌀 농사의 위기가 도래한 것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쌀 재배면적이 소비량보다 많아 쌀 재배면적을 줄여야 한다고 정부는 늘상 주장하지만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 심각해질수록 쌀 생산량은 점점 더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권한대행은 국회를 통과한 양곡관리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기후위기를 대비하는 쌀을 비축해야 한다
정부는 양곡관리법이 ‘구조적인 쌀 공급과잉 고착화, 이에 따른 쌀값 하락 심화, 쌀 이외 다른 작물 전환 저해, 막대한 재정 소요 등의 부작용을 불러 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곡관리법은 부작용보다 이익이 더 크다. 일본에서 레이와 쌀 소동이 일어난 것은 민간양곡업자들이 쌀을 사들였기 때문에 국민들의 불안감이 가중된 원인이 가장 크다. 양곡관리법은 정부가 쌀을 사들여 시장을 안정화시키는 일이고, 주식이 부족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국민에게 주는 일이다. 정부는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 농민들이 무분별하게 벼농사를 계속 짓고, 결과적으로 쌀 재배면적이 줄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기후위기 시대를 대비해 충분히 쌀이 비축되도록 벼농사를 더욱 장려해야 한다. 국민의 주식인 쌀은 시장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에서 관리되어져야 한다. 양곡관리법 시행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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