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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의 먹거리 정의 | 추석, 기원과 연대의 날

 

2024-09-20

박진희는 로컬의 지속가능성 활동가로 (재)장수군애향교육진흥재단 사무국장이다.   초록누리 협동조합의 이사장을 역임했으 한국농어민신문, [박진희의 먹거리 정의 이야기] 와 본지의 '박진희의 먹거리정의'를 연재하고 있다.

박진희는 로컬의 지속가능성 활동가로 (재)장수군애향교육진흥재단 사무국장이다. 초록누리 협동조합의 이사장을 역임했으 한국농어민신문, [박진희의 먹거리 정의 이야기] 와 본지의 '박진희의 먹거리정의'를 연재하고 있다.

 

대추나무가 있지만 대추를 사야 한다

추석 연휴는 지나고 진짜 추수를 위해 고된 날들이 성큼 다가왔다. 추석은 감사하는 날이 아니라 결실을 맺어가는 과정이고 고된 노동을 함께 격려하는 날이 아닐까. 사진_한국교육방송공사의 "EBS_식품_0500"

고작 10년 정도 농사를 지어 농부였다고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농사짓던 시절 추석만 되면 ‘도시에 살 때와 내가 뭐가 다르지’ 싶은 기분이 들곤 했다. 겨울이 긴 전북 장수군, 그것도 해발 530m의 높은 산자락에서 산다. 그래서 남들이 봄꽃이 피었다 하면 우리는 열흘 정도 뒤에 봄꽃이 피었다. 계절은 다른 지역보다 느긋하게 다가와 수확 시기는 언제나 다른 지역의 열흘 정도 뒤가 되곤 했다. 그래서 추석 즈음에는 차례상에 올릴 밤이 익어 떨어지지도, 대추나 감이 익지도 않았다. 우리 집에는 감나무 두 그루가 있다. 장수는 추워서 감나무 농사가 잘 안 된다고 하는데 우리 집은 해발이 높은 마을의 집 중에서도 첫 번째 집이라 뜨는 해와 지는 해가 길게 들어와 우리 집 감나무는 모두 실하게 열매를 맺는다. 집 마당 한쪽에 대추나무도 한 그루가 있고, 마을 여기저기에 마을 사람이면 누구나 딸 수 있는 밤나무도 있다. 그런데도 추석에는 감, 대추, 밤 모두 아직 여물지를 않아 우리는 차례를 준비하느라 시장에서 밤, 대추, 감을 산다. 벼농사를 지었지만, 조생종 벼를 심지 않아 햅쌀도 산다. 농촌에 살고 농사를 짓고 살았건만 우리 집의 추석 장보기는 도시에서 살 때와 영 다르지 않았다.


추석날이지만 참깨를 턴다


추석에 우리를 가장 바쁘게 한 것은 무르익은 오곡백과를 수확하는 일이 아니라 붉은 고추를 따서 태양초를 만드는 일과 참깨를 터는 일이었다. 추석 하루 전날은 온종일 차례 음식 만드는 일에 분주하지만, 우리 부부와 시어머니는 차례를 지내기 무섭게 마당으로 나와 널어 둔 고추를 정성껏 뒤집고, 붉은 고추를 따러 종종거리며 다시 밭으로 나갔다. 밭에서 돌아오면 수확해 온 고추를 씻고, 널고, 뒤집고, 볕에 잘 마른 고추를 갈무리했다. 그리고 작업장이나 마당으로 나와 참깨를 털었다. 아이들은 나도 참깨를 털어 본다며 키를 손에 쥐었다가 이내 어렵다고 포기를 선언하고 옆에서 쭉정이가 날아가게 바람을 일으켜 주다가 슬그머니 사라져 저만치서 뛰어놀았다. “엄마 보름달이야 소원을 빌어야지” 하는 아이들 성화에 졸린 눈을 비비고 마당에 나갔다 들어와 정신없이 잠을 자고, 다음날이면 다시 일어나 태양초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면 길고 달콤할 것 같았던 추석 연휴는 어느새 지나가 버리고, 진짜 추수를 위해 고되게 일해야 하는 날들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농사를 지으면서, 추석은 추수를 감사하는 날이 아니라 결실을 맺어가는 과정을 돌아보고, 봄부터 쉼 없이 이어온 고된 노동을 함께 격려하는 날이 아닐까, 서로의 격려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추수까지 함께 인내하자는 약속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도시에서 살 때는 전을 부치고, 나물을 하고, 내가 밥상을 지금 몇 번째 차리나. 설거지를 몇 번째 하는 건가 하던 추석이었는데, 농촌살이의 추석은 나를 철학의 세계로 이끄는 것 같았다.



'본격적인 추수까지' 연대의 퍼포먼스


우리는 추석에 혼자서는 둥근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고, 여럿은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돈다. 보름달의 토끼는 공이를 들고 떡방아를 찧고, 우리는 햅쌀로 송편을 빚는다. 누군가는 벌초를 미리 해 두고, 차례를 지내고, 묵직한 걸음으로 성묘를 간다. 어민들이 출항을 앞두고 만선을 기원하는 굿과 추석은 다를까? 바다를 향한 기원과 보름달을 보며 비는 소원은 다를까? 생각할수록 추석은 기원과 연대의 퍼포먼스이자 나와 우리라는 존재에 대한 각성의 장인 것만 같다. 인간의 노동과 사람과 공동체를 살리는 농사에 대한 경외감이 없었다면 추석이 한국의 대표적인 명절이 되었을 리가 없다.

추석이 맞나 싶게 더할 나위 없는 폭염과 함께 추석 연휴가 지나갔다. 이 무더위에도 일가친척은 모이고, 집집마다 차례상이 차려졌다. 기후위기로 차례상에 올라가는 음식은 달라졌겠지만 풍요를 비는 마음은 누구도 달라지지 않았을 터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무더위에도 추수와 결실의 시기가 오고 있다. 추석의 마음으로 모두 함께 풍요를 기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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