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과 새로운 세계질서.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과 시사점을 다룬다. 지정학적 현실로 볼 때, 세계는 힘으로만 결정되는 새로운 질서에 진입했다. 자국의 역사와 한계를 경시하는 국가는 파멸할 것이다.
2025-03-06 최은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째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현실 정치를 보는 강력한 도구, 지정학
지정학(Geopolitics)은 기묘한 학문이다. 정치학과 지리학, 역사학 사이 어딘가에서 발원한 이 학문은 거칠게 정의하자면, ‘지리적 공간이 국가, 혹은 국제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근대 지정학의 창시자 격인 영국의 헬퍼드 J. 매킨더(Halford J. Mackinder, 1861~1947)가 말한 게 유라시아 심장지대(Heartland)였고, 미국의 니컬러스 스파이크먼(Nicolas J. Spykman,1894~1943)이 얘기한 게 대륙세력에 맞선 림랜드(Rimland)라는 개념이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공간이 주는 강력한 영향력에 대한 이러한 탐구는 역사학에서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1902~1985)이 주도한 아날학파의 연구와 이른바 ‘장기지속’하는 역사적 경향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이들 세 사람 모두 이른바 ‘제국’ 출신이었다. 이들의 후 세대들인 한스 모겐소나 헨리 키신저 등등의 인물들 모두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제국’ 출신이고, 때문에 지정학이 ‘제국의 학문’이며 소위 기미정책(羈縻政策)을 위한 나침반이라는 오명을 쓴 이유다.
지정학적 '단층선'에 놓인 국가
지정학을 둘러싼 이런저런 논의는 오늘의 주제가 아니다. 다만 지정학이 현실정치(Real Politics)를 바라보는 강력한 도구라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우리 같이 갓 1세계로 진입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는 지정학적으로 지리적 경계와 민족적, 국가적 경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 발생하는 위험성이다. 평원과 산맥과 하천의 경계가 명확한 국가적, 민족적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일컬어 ‘단층선’에 비유한다. ‘단층선’에 위치한 국가는 대개 다민족, 다언어, 다종교인 경우가 십상이다. 그래서 취약하고, 때때로 ‘발화점’이 된다.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대표적인 ‘단층선’이었던 유고연방(티토의 유고슬라비아)이 완전히 해체된 후, 적어도 유럽에서 열전(熱戰)의 불이 붙기 쉽지 않으리라 여겨졌다. 그리고 이런 착각이 환상이었다는 것은 2022년 2월 23일 밤에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구 5천만이 2천8백만명으로 쪼그라들다
이 칼럼을 쓰는 시점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은 급격히 종전(終戰)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전쟁의 배경이나 경과, 혹은 군사적 충돌의 양상(드론과 위성과 참호와 지뢰가 뒤섞인)은 스펙터클한 영상과 함께 제공되었다. 하지만 서방미디어를 통해 보도된 내용들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는 미스테리하다. 일방적으로 러시아의 승리로 마무리될 것 같던 전쟁은 3년을 끌고 있고, 양측의 군사적 손실이 어땠는지, 왜 초기의 휴전 시도가 실패했는지(영국의 보리스 존슨이 충동질한 것으로 보이는), 러시아가 기동전을 포기한 이유가 의도적인 군사전략이었는지, 심지어 북한이 정말 참전한 것인지 알쏭달쏭할 뿐이다. 확실한 것은 한반도의 3배쯤 되는 국가 면적의 20%를 러시아가 장악했다는 것(남부와 동부가 연결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전쟁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구 5천만의 국가가 2천8백만으로 쪼그라들고 8백만이 넘는 민간인들이 국외로 탈출했다는 것, 1백만명이 넘는 인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것 등등이다. 한마디로 국가로서의 우크라이나는 폭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장 속 '냉혹한 피', 현실 속 '제국의 피'
그리고 지난 2월 28일, 워싱턴에서 열린 트럼프와 젤린스키의 회동은 정말 끔찍했다. 한편의 잘 짜인 소동극 속에서 젤린스키는 ‘양복조차 차려입지 못한’ 광대에 불과했다. 트럼프의 미국은 마치 조무래기의 뺨을 때려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동네 양아치 형처럼 보였다. 냉혹한 피(Cold Blood)는 트루먼 카포티의 문장이 아니라, 현실에서 ‘제국의 피’이기도 한 셈이다. 아마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바, 어떠한 배려도, 최소한의 체면치레도 없는 이런 정상회동은 본 적이 없다.

지정학적 현실을 경시하는 지도자는 국가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
이 시점, 그러니까 가까스로 내란음모가 종식되고 새 리더쉽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는 한국인의 눈으로 이 전쟁과 종전으로 가는 과정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다음 두 가지는 명확해 보인다.
첫째, 트럼프 2기의 미국은 우리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의 문을 열었다는 사실.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우경화, 포퓰리즘의 흐름은 지속될 것이다. 소프트 파워, 하드 파워 같은 섬세한 구분에 기초한 ‘제국주의’는 이제 없다. 그냥 ‘Power’로 결정되는 싸움판에서 X까라면 까야 한다. 좋은 경찰, 나쁜 경찰을 구분할 필요 없이 경찰도, 심판도 없는 도떼기시장 한복판에서 우리는 ‘비상한 각오’를 해야 한다. 제조업과 무역으로 먹고 사는 우리가 멈칫하는 순간, 나락이다. 산업과 외교에서 ‘혈로(血路)’를 열지 못하면, 우리는 서서히 가라앉을 것이다.
둘째, 지정학적 현실, 혹은 Real Politics를 경시하는 지도자는 그의 국가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 상대의 수를 읽지 못한 젤렌스키는 범용(凡庸)할뿐더러, 자국의 역사와 한계를 보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치명적으로 무능했다. 일본 외교관의 눈으로 본 우크라이나 역사서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구로카와 유지, 글항아리, 2022)나 동유럽 유대인 출신의 작가가 쓴 『굿바이, 동유럽』(제이콥 미카노프스키, 책과함께, 2024)을 보면 이런 역사와 한계에 대해 소상히 파악할 수 있다. 10세기 즈음, 키에프공국의 성립 이전, 스키타이와 훈족과 아바르가 명멸했던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우리는 명확한 영토와 종족의 경계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4세기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그리고 오스만 튀르크의 쟁투가 있었고, 18세기 이후 러시아의 자치령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 크림반도와 드네프르강 우안은 좌안과 애초에 민족구성이 달랐고, 2차 대전 이후 폴란드의 일부를 떼어 합병했다는 것, 크림반도는 1954년 흐루시초프가 선물했다는 것(왜?) 등등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러시아는 그 국가가 존속하는 한, 절대로 크림반도와 돈바스와 도네츠크(드네프르강 우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코사크의 땅, 우크라이나는 오늘 슬프다
그리고 남은 질문들.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땠을까라는 질문에서 나오는 핵안보의 문제. 이런 식의 종전으로 러시아는 머무를 것인가? 새로운 유럽-러시아 관계 속에서 한국은 어떤 포지션으로 가야 하는가?는 숙제로 남을 것이다.
10대 시절에 탐독했던 책 중에 『대장 부리바』가 있었다. 니콜라이 고골이 쓴 이 책에서 나는 코사크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었다. 그저 러시아 초원의 카우보이쯤이라고 생각했던 코사크가 일종의 자치 농민 무장집단이고 우크라이나 역사의 큰 줄기라는 것을 훗날 알게 되었다. 한때 자유로운 전사의 상징이었던 코사크의 땅, 우크라이나는 오늘 슬프다. 이 서글픈 전쟁의 사상자들이여! 편히 잠드소서. R. I. P.
*기미정책(羈縻政策): 중국의 역대 왕조가 다른 민족에게 취한 간접 통치 정책. 기미는 굴레와 고삐라는 뜻으로, 이민족에 대해 자치를 인정해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이른다. (표준국어대사전)
*트로먼 카포티(Truman Capote): 1924년 미국 뉴올리언스 태생으로 고등학교 때 『뉴요커』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썼다. 미국 문학사에서 매력적인 여주인공을 창조해 낸 『티파니에서 아침을』(1958)로 유명세를 탔다. 1966년 캔자스 홀컴 마을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을 조사해 완성한 『인 콜드 블러드 In Cold Blood』로 '논픽션 소설' 장르를 새롭게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이 책은 실제 범죄의 생생함과 인간의 연약한 내면을 극명하게 묘사한 범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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