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6 배이슬
봄이 오는 소리에 깨어나는 자연의 시간, 경칩. 농부가 씨앗의 겨울잠을 깨우는 세 가지 방법을 풀어놓았다. 이불 걷어 젖히기, 물 끼얹기, 등짝 때리기. 이즈음에 영등할매바람이 분다.

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사로 익힌 다름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농사를 알리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일터인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 농장이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는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
영락없이 몸에게 들킨 봄의 시간
영영 녹지 않을 것 만 같던 눈이 녹는다. 이른 아침 서릿발이 약해졌다. 날이 차도 바람 끝에 야무지던 매서움이 한결 줄어 코끝이 덜 시렵다. 봄이 감각으로 금새 알아챌 만큼 부쩍 왔다. 농사를 지으며 살다 보면 영락없이 몸에게 들켰구나 싶은 순간이 있다. 아직 갈무리할 일이 산더미인데 겨울이 온 것을 몸이 알아채면 시글시글 잠이 온다. 겨울잠 자는 개구리와 씨앗처럼, 몸이 동면에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러다 봄이 오면 비도 오고 하니 늦잠 좀 잘라 치는데 몸의 시계에게 봄이 온 것을 들켜버리면 기어이 새벽에 눈이 떠진다.


해 뜨고 일어나는 농부와 철든 농부
처음 농사짓기 시작해서는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자도 자도 자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해 뜨고 일어나는 농부가 어디 있냐며 혼을 내셨다. "그런 농부 여기 있네~ 해 뜨고 일어나는 농부~!" 하고는 넘겨버리곤 했다. 신기하게도 농사를 지은지 10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몸이 계절에 맞춰진 것처럼 움직여지곤 했다. 할머니, 아버지께서 이야기한 '해 뜨고 일어나는 농부'라는 이야기는 단순히 그날의 게으름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리듬을 같이하는 것이 농부인데 철이 덜 들었던 것을 가리킨 뜻도 있었겠구나 가늠한다.
잠이 깨느라 날이 풀릴 듯 다시 차기를 반복한다. 짧게 자고도 잘 일어나는 날도 있지만, 자다 깨서 다시 잠든 날은 눈뜨기가 더 어렵다. 겨울잠을 자다 깨는 것처럼 날이 풀렸다 추우면 씨앗도 나도 잠이 설깬다. 그래서 경칩, 개구리가 봄이 오는 소리에 놀라 깨서 울음소리를 낸다는 말처럼, 봄이 묻어 있는 바람에 마음이 급해진다. 씨앗을 깨우고, 땅을 깨우고, 손을 깨우려면 마음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기지개를 펴는 풀과 씨앗
부러 갈아엎지 않은 땅이라면 겨우내 마르고 얼고, 눈에 눌려 꺾이고 스러진 잎줄기 덕에 씨앗이 바닥에 착! 붙은 채로 흙에 더 가까워진다. 그렇게 누르던 눈이 녹으며 흙 속에 스미면 잠을 자듯 몸을 움츠리던 생명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에너지를 아끼느라 단풍을 들이고 바닥에 붙어 있어 잘 보이지 않던 겨 달맞이꽃이며 냉이 같은 겨울난 식물들이 물을 먹고 볕을 들이느라 부쩍 생생해지기 시작한다. 추위를 버티느라 움츠렀던 보리나 밀, 씨 받으려고 남겨 둔 배추 같은 것들도 물을 끌어올리는 게 보인다. 소리는 나지 않지만 꼭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소리가 나는 모양새다. 우수수 녹은 눈을 이때부터 부지런히 삼켜 둬야 상징처럼 오는 봄 가뭄을 잘 이겨내는 것이 아닐까.

잠을 깨는 세 가지 방법
잠이 잘 깨지 않을 때는 이불을 홀딱 걷어내 부러 흔들어 깨우거나, 물을 끼얹거나 등짝을 한 대 얻어맞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사람이나 씨앗이나 말이다. 그래서 봄은 차근차근 계단을 오르듯 온다. 잠이 덜 깬 생명들을 천천히 달래듯 봄은 오다 말다 하는 것처럼 추웠다 풀렸다 하며 온다. 봄을 맞아 씨앗을 깨우는 것도 이와 같다.
하나, 이불 걷어 젖히기. 어둡게 관리하던 씨감자나 고구마, 씨앗 받을 무나 당근은 이불을 걷어 볕을 만나게 하면 잠에서 깨고 싹을 기른다. 든든하게 영양을 많이 모아 뒀으니, 제법 쉽게 잠에서 깬다. 이불 속에서도 설풋하니 잠이 깨는 것처럼, 암만 잘 덮어 뒀어도 봄을 알아챈 것들은 이미 싹을 내고 있기도 하다.

둘, 물 끼얹기. 고추, 가지, 토마토는 물을 끼얹어 깨운다. 따땃한 물에 담궜다가 찬물에 하룻밤 담궈 꺼낸다. 씨앗은 항상 제 먹을 만큼만 물을 먹고 잠에서 깨면 그 이상의 물은 먹지 않는다. 대신 잠에서 깨 큰 숨을 쉬니 숨쉬기 좋게 물에서 건져 둔다. 계속 담궈 두면 숨을 쉬지 못해 썩는다. 그렇게 물에 담궈 깬 씨앗들은 바로 뿌리기도 하고, 모종을 내기도 하고, 촉을 틔우기도 한다. 촉을 틔우는 것은 씨앗이 잘 영글었는지, 자는 동안 푹 잘 잤는지 확인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촉난 것이 부러질 것을 걱정하면 바로 뿌리는 게 낫지만, 걱정된다면 부러 미리 촉트는 꼴을 보기도 한다.


셋, 등짝 때리기. 잠에서 깨기 쉽지 않은 몇몇 씨앗들은 등짝을 한 대 때리듯이 깨우기도 한다. 여주나 연꽃, 수박이나 박, 목화 같은 씨앗들은 오래도록 살아남기 위해 불리한 조건에서는 오래오래 숨을 아끼며 잠을 자게 진화했다. 씨앗 껍질을 단단히 만들었거나 물을 잘 먹지 않게 털을 가득 가진 기름기 있게 껍질을 만들었다. 오랜 잠에서 깨우려면 한쪽 끝을 자르거나 깨고, 사포에 긁어 틈을 내야 물을 마시고 잠을 깬다.

영등할매가 신나게 돌아가는 때
이맘때 방향을 알 수 없이 바람이 불어 제낀다. 몇몇 식물과 곤충들은 봄이 온다고 기지개를 켰다가 도로 얼어붙곤 한다. 할머니는 이때 부는 바람을 영등할매바람이라고 했다. ‘영등할매가 누군데 이렇게 모종키우기 힘들게 군데?’ 하고 물으면 할머니는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답해 줬다. ‘땅에 왔다가 하늘로 가는데, 꼭 너맹키로 소란스런 딸이랑 며느리 데리고 올라가서 그런 거여.’ 하고 답했다.
‘긍게, 영등할매 딸이 나처럼 시끄럽고 하도 떠들어대서 바람이 이렇게 시끄럽게 분다고?!’
‘그려.’
할머니가 나 같다고 하니 반박할 수가 없었지만, 이맘때 부는 영등할매바람이 5~6년 전만해도 음력 2월 말 즈음에 불었는데, 점점 더 4월, 5월까지 오래, 방향을 알 수 없게 세찬 바람이 많아졌다. 그래서 어느 해에는 임시로 만들어 둔 육묘하우스가 홀랑 날아가기도 하고, 하우스를 단단히 메어 둔 비닐끈이 툭! 끊어지는 때도 있었다.

영등할매 손녀딸들이 늘었나, 딸들이 더 할 말이 많아졌나 알 수 없지만, 국소적으로 기후가 오르고 내리는 일들이 늘어가며 차곡차곡 오르던 계단참의 폭이 벌어져 한걸음 떼기가 힘들다.
‘본래 고춧모내는 것이 갓난애 보듯하는 거여, 추울세라 더울세라 마를세라 자꾸 디다보켜 키우는 거여.’
해가 뜨고 나서 열고 해가 지기 전에 덮고, 덥기 전에 충분히 물을 주고 해질 때는 잘 마르게 손에 손을 보태야 씨앗 하나가 싹터서 어린이가 되는 시간이 경칩이다. 올해는 서서 개구리 소리를 들었으니 부지런히 철든 농부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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