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토우치 트리엔날레를 찾다 ⑥ 대지의 예술제, 에치고 츠마리 아트 트리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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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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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0 고은정, 제종길, 이응철
일본의 대표적인 지역 예술제인 '에치고 츠마리 아트 트리엔날레'는 마을 사람들과 자연의 숨결을 예술로 승화시켜, 사람과 작품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독특한 문화예술 공간이다.
고은정 전 수원시 디자인기획관, 도시공학박사
제종길 13대 안산시장, 17대 국회의원, 해양학 박사
이응철 전 일본 국립사가대학교 교수, 농학박사·보건학 박사
예술이 마을을 살릴 수 있을까?
일본의 지역 예술제를 이야기할 때, 세토우치 트리엔날레부터 언급된다. 하지만 이 예술제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 예술로 지역을 살려 낸 또 다른 사례가 있었으니, 바로 ‘에치고 츠마리 아트 트리엔날레(越後妻有 大地の芸術祭, 이하 '대지의 예술제')’다. 2000년 처음 막을 올린 '대지의 예술제'는, 일본 지역 예술제의 원조 격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1994년, 니가타현이 10년짜리 지역 활성화 프로젝트 ‘에치고 츠마리 아트네클리스 마스터플랜’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10년 동안 차곡차곡 준비한 끝에 마침내 예술제가 열렸고, 그 후 3년마다 변함없이 이 거대한 '대지의 예술제'가 9차례 이어져 왔다. 버려졌던 농촌 마을은 어느새 전 세계 사람들이 찾아오는 문화의 성지가 되었다.
놀랍게도, 이 예술제는 단순히 규모로도 세계 최대다. 760㎢라는 어마어마한 면적 위에 약 200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지금까지 상설 작품만 800점을 넘긴다. 참고로 서울의 면적은 605㎢다. 인구 6만3천의 시골 마을에 2022년에는 무려 57만 명이 방문했다는 건, 예술이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서, ‘경험하고 머무는 것’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또 예술이 마을을 얼마나 강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숫자다.

에치고 츠마리—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그곳의 이름
처음 ‘에치고 츠마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땐,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에치고?', '츠마리?' 혹시 '에치고츠 마리?' 아니면 '에치 고츠마리?' 낯설고 어딘지 조합도 어려운 이 이름은 심지어 지도에서도 바로 찾기 어렵다. 행정구역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치고 츠마리는 니가타현 남부의 넓은 지역을 일컫는 일종의 지명 관용어로, 도카마치시(十日町市), 가와니시정(川西町), 나카사토촌(中里村), 마츠시로정(松代町), 마츠노야마(松之山), 그리고 츠난정(津南町)까지 6개 구역에 걸친 광대한 지역을 통칭한다.
‘에치고’는 예전 일본의 지방 행정 단위였던 ‘에치고노쿠니(越後国)’에서 유래했고, ‘츠마리’는 이 일대를 오래도록 살아온 사람들이 부르던 옛 지명의 흔적이다. 행정 명칭이 아니라 지역 주민의 입에서 전해 내려온 이름, 바로 그 점이 이곳의 정체성을 잘 보여 준다. 한국의 서울보다 훨씬 넓은 땅에 펼쳐진 시골 마을들. 논이 겹겹이 층을 이루며 뻗어 있고, 겨울엔 수 미터씩 눈이 쌓이는 이곳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다설 지역으로, ‘눈의 나라’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다. 하지만 한때 이 지역은 일본의 수많은 농촌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황폐해져 가고 있었다. 도쿄에서 하네다공항에 내려 다시 버스로 3시간 이상 달려야 닿는 거리. 그만큼 먼 곳이고, 그만큼 잊힌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고립성과 고요함이 오히려 이곳만의 예술을 가능하게 했다.
작품이 자연을 따라 배치되고, 마을을 품고, 사람들의 삶에 녹아드는 방식은 도시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을 만든다. '에치고 츠마리'는 그저 ‘시골’이라 불리기엔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장소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단지 유명한 작가나 거창한 작품만 있는 게 아니라, 오래도록 그 땅을 지켜온 마을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 그리고 자연의 숨결이 있다.

이동하는 동안 시선을 끄는 창고. 사마보코식이라고 불리는데 기차의 아치 구조물에서 비롯되었다. 최소한의 재료 두 장으로 벽체부터 지붕까지 연결하고 지붕 꼭대기에서 양쪽 면을 이어 붙인 간단한 구조로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에 감탄했다. 폭설이 내리는 지역에 적합한 형태다. 크고 작은 것, 낡은 것과 새것이 공존하고 있어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유용하게 쓰이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이 지역의 독특한 개성이라 봄 직했는데 실제 여러 개의 예술작품이 이 창고에서 영감을 얻었다. 사진_고은정
불친절한 예술제가 주는 진짜 친절
이곳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감정은 ‘약간의 당황스러움’이다. 작품이 너무 흩어져 있다. 효율적인 동선? 그런 건 기대할 수 없다. 대신 버스에서 내려 마을 길을 걷고, 산자락을 오르며, 그 풍경 속으로 스며들기를 요구받는다. 예술제인데 예술이 중심이 아니라, 마을과 자연이 중심이다. 예술은 그저 그 배경 속에 곁들여져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핵심 개념은 ‘사토야마(里山)’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아온 일본 전통의 농촌 풍경이자 생활 양식을 말한다. 즉 뒷산과 계단식 논, 흙냄새 나는 마을 집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작품은 이런 일상 풍경 속에서 조용히 말을 건다.

작품이 말해 주는 이야기들
대지예술제에는 자연과 사람, 재해의 흔적까지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들이 많다. 예를 들어 2015년 예술제의 상징이었던 ‘토석류의 모뉴먼트(土石流のモニュメント)’는 동일본 대지진 당시의 토사유출을 기억하기 위한 작품이다. 당시 지진으로 약 16만㎥의 토사가 흘러 도로를 매몰시키고 논까지 덮쳤다. 이 흔적을 잊지 않기 위해 노란색의 높이 3m짜리 폴 230개를 토사가 흘러내린 흔적의 경계부에 설치했다. 부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계단과 전망대가 있어, 지진 당시 얼마나 충격이었을지 직관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

폭염 주의보? 그래도 여름에 여는 이유
이 예술제는 왜 하필이면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7~9월 사이에 열릴까? 보통 축제나 문화 행사는 날씨 좋은 봄이나 가을에 열린다. 덥고 습한 니가타의 여름 한복판. 그런데 이 불편한 시기를 선택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봄과 가을은 농사로 가장 바쁜 시기, 겨울엔 폭설. 결국 여름이야말로 마을 사람들이 예술제를 함께 준비하고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것이다. 작품의 상당수는 마을 사람들이 직접 운영하고, 가이드를 맡거나, 카페를 열고, 손님을 맞이한다. 관람객보다 주민을 먼저 생각한 기획. 이것이 이 예술제가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다.

겉은 시골집, 속은 미술관
‘빈집 프로젝트’ 역시 이 예술제를 특별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외관은 시골집 그대로인데, 내부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탈바꿈한다. 방문객들은 문 앞에서 몇 번이고 지도를 들여다보며 “정말 여기 맞나?”라고 확인하게 된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는 ‘탈피하는 집(脱皮する家)’이다. 평범한 목조 민가의 내부를 전부 조각해 껍질을 벗기듯 표현한 이 작품은, 기획부터 완공까지 무려 2년 반이 걸렸다. 수공으로 만들어 낸 목재 패턴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유기적인 감각을 자아낸다.
이처럼 외형은 그대로 두고 내부만 탈바꿈한 방식은, 마을 풍경을 해치지 않기 위한 배려에서 출발했다. 이미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일상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예술을 끌어들이는 마음. 그 따뜻함이 '대지의 예술제'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예술도 시스템도, 모두가 예술
이 글에서 다 다루지는 못했지만, 대지의 예술제가 감동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운영 자체가 예술’이라는 데 있다. 기획, 구성, 동선, 커뮤니케이션, 커뮤니티 운영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이뤄진 것이 없다. 예술과 삶, 자연과 사람, 외부와 내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 공간에서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다. 세토우치 트리엔날레와 종종 비교되지만, 에치고 츠마리는 더 투박하고, 더 불편하고, 더 인간적이다. 그래서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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