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만 대표 편집인
오는 9월 7일 ‘기후정의행진’이 열린다. 2019년 시작되어 네 번째다. 작년 행진에서는 약 3만 명의 시민이 운집했다고 한다. 올해는 400개 넘는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만큼, 그 규모가 작년을 훨씬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단체는 노동자, 농민, 여성, 청소년, 종교, 환경, 홈리스, 성소수자 등 사회 다양한 부문을 대표한다. 장소는 광화문이 아니고 강남 일대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탄소 배출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기업들의 본사가 있다. 작정한 것이다.
올해의 구호는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다. 세상을 바꾸지 않으면 기후는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기후가 아니라 세상이다. 세상을 바꾸는 게 간단치 않은 일이겠지만 그래도 인간 세상을 목표로 하는 게 가능한 일일 게다. 더욱이 잘 돌아가던 지구를 망치고 있는 건 우리 인간이니 말이다.
‘기후위기’나 ‘기후 재난’은 풀어야 할 과제다. 원인과 상황을 분석해서 해결 방안을 내놓고 실행하여 문제를 제거하면 되는 것이다. 재해가 발생하면 우리는 이렇게 한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딴지를 놓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기후 정의’라는 말이 나오는 건 해결이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의’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정의’의 다른 표현은 ‘기후 불평등’이다. 이 말들 속에는 다가오는 재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국민들의 불만이 농축되어 있다.
그동안 잘 작동하던 기후 메커니즘에 문제가 생긴 건 지구 표면온도의 급상승 때문이다. 표면온도는 기온과 수온 모두 포함한다. 온도 급상승의 원인은 인류가 개입한 활동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산업 발전을 위해 마구 캐낸 화석연료 연소에 의한 대기 중 탄소 배출이 이유다. 석탄, 석유, 가스와 같은 화석연료는 탁월한 에너지 효율을 가졌고, 덕분에 인류는 지금의 문명을 이루었다. 2백 년 전 아니 백 년 전 선조들이 상상 할 수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기후위기는 풍요의 대가(代價)인 셈이다.
원인을 알았으니 탄소 배출을 억제하고 없애면 된다. 이유도 알고 해결책도 명확하다. 화석연료 대신 대체 에너지원을 찾으면 된다. 인류가 현재 가진 기술과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해결 과정이 이렇게 단순하고 명쾌한데 현실은 녹록치 않다. 우리 사회는 화석연료에 너무 깊게 의존하고 있다. 풍요를 과점하고 있는 이들의 집착은 여전히 견고하다. 하지만 국민 다수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동안 성장의 시대에는 ‘분배의 정의’가 주된 화두였다. 성장의 열매를 적절하게 나누는 방식이 각 계층들의 주된 관심이었다. 그런데 화석연료 기반 성장은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성장하지 못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기후위기는 왜 성장이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다. 사회적 약자에게 피해가 집중되고 증폭될 수밖에 없는 위기 구조는 새롭게 ‘기후 정의’를 담론으로 제기하게 만든다.
자본주의는 모순을 전가시키면서 살아남았다. 이는 지구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산업국들은 개발도상국들에게 부담을 넘겨 왔다. 하지만 계속해서 모순을 전가하는 것은 답이 아님을 신자유주의의 실패는 보여 주고 있다. 기후 정의는 성장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한다. 다른 방법을 요구한다. 기후 정의의 이정표로 ‘탈성장’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우리는 성장의 늪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는지 모른다.
기후위기는 개별 국가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대한민국의 온도가 내려간다고 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또한 산업화 이전 안전한 온도로 돌아갈 수도 없다. 대기 중에 있는 이산화탄소는 수천 년 동안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한다. 기후 문제에 관한한 우리는 ‘차선의 게임’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기후 악당’은 되지 말아야 한다. 지구 차원의 연대를 위한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다. 차선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 수도 있다.
‘907 기후정의행진’에 환경단체뿐 아니라 각계각층의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성장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든 기업과 기후 정의를 요구하는 국민 사이에서 이해관계를 조율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중재자이기 때문이다. 이번 22대 국회에는 기후 정책을 공약으로 삼은 ‘기후 후보’들이 유난히 많이 원내 진입을 했다. 이제는 의원이 된 분들이 국회의사당을 벗어나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봤으면 좋겠다. 기후 정의는 사회 정의이고 지구 정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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