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만 대표 편집인
소복소복 내리는 눈 만큼 서정의 샘을 자극하는 것도 드물다. 하얗게 변한 세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파에 찌든 마음이 정화되곤 한다. 하지만 감상은 여기까지이다. 잔설까지 허락하지 않는 대대적인 제설(除雪) 작전으로 순식간에 ‘눈’은 도시에서 사라진다. 동원되는 장비들이나 살포되는 화학 제설제 규모를 보면 ‘화학전’을 방불케 한다.
어린 시절, 눈이 내리면 빗자루를 챙겨나가 집 앞을 쓸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동네 어귀까지, 사람들이 다니던 골목길 눈을 치우던 기억이 난다. 겨울철 눈을 치우는 일은 개인과 마을 사람들의 몫이었다. 관공서의 행정력이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눈 치우는 일은 나와 마을공동체의 책임이라는 인식을 당연히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우스갯소리로 지금은 빗자루를 챙기는 대신, 읍면사무소와 자치센터에 전화부터 한다고 한다.
나는 ‘제설’이라는 단어가 마뜩잖다. 내린 눈을 굳이 그렇게 다 ‘제거’해야 하는 걸까. 생각해 보면 자연의 모든 현상은 필요에 의해 시스템으로 작동되고 있다. 눈은 수자원 보존, 생태계 균형 유지, 기후 조절, 토양 보호, 생물종 다양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염화칼슘 같은 화학제가 아닌, 친환경 제설제를 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염화칼슘은 1970년대 초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제설’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염화칼슘은 토양과 지하수, 인근 수역에 유입되어 식물과 수생 생태계에 교란을 일으킨다. 제설 작업으로 순식간에 사라진 눈은 토양 침식과 미생물에까지 영향을 주고 수질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제설 작업을 맡고 있는 공무원들은 친환경 제설제보다는 고효율 화학 제설제 사용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비용보다는 민원을 빨리 해결해야 하는 게 우선 순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개발’과 ‘성장’이라는 키워드 안에서 ‘시간 절약'이 최고의 ‘기술’이 되었고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서 모든 것을 ‘제거’해 왔다. 쌓인 눈은 불편하고, 빨리 제거해야 하는 위험한 ‘것’이 되었다. ‘불편함’을 가져 와야 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얼마 전 ‘녹색전환연구소’에서 전국 17,000명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한 ‘기후 정치’ 관련 여론조사를 분석하여 발표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후 문제가 정치적 의제가 되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었다. 모 언론사에서는 ‘기후 정치 바람이 분다’라는 표지 기사로 꽤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고무적인 일이다.
생각해 보면 인류의 문명 발전은 불편을 편리로 바꾸는 과정이었다. 불편함을 개선하고자 하는 욕구가 과학과 기술, 경제 발전의 주요한 동기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인류는 그 동력으로 눈부신 성장을 했고, 지구 생태계 가치 사슬의 최정점에 도달한 지금도 성장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무한 성장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강박적인 성장 가도에 부작용이 노출되고 있다.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성장 완화’ 와 ‘탈성장’이 등장했고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듯 보인다.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낙관하는 나 역시, 이것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는 의제라고 생각한다. 성장 완화나 탈성장 논의의 이면에는 ‘불편’을 왜 감수해야 하고 그 의지를 어떻게 함양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이 내재되어 있다.
캐나다에서는 집 앞의 눈을 치우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고 한다. 어렵게 시간을 내 휴가를 갔는데 눈만 치우다가 왔다는 농담 섞인 캐나다 여행담을 들으면서, 국가의 정책이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본다. 기후 위기 시대에 국가는 ‘제거’의 주체가 될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생태 교육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공유하게 하고, ‘공동체’라는 키워드를 우리 사회에 다시 살려내야 할 때이다.
눈을 나타내는 한자어 '설(雪 눈 설)'은 비 우(雨)와 빗자루 혜(彗)가 더해진 글자로 ‘눈이 오면 빗자루로 쓸다’의 뜻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눈(雪)을 ’비가 얼어 만물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비와 달리, 눈은 쌓이기에 잠시 인간을 위해 옆으로 치워두는 것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아이들이 눈을 보고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고,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할 수 있게 남겨두는 건 어른들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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