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만 대표 편집인
‘커먼스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은 미국의 생태학자 개릿 하딘이 사이언스지에 기고한 에세이 제목이다. 개인의 죄의식 없는 이익 추구가 사회 이익의 축소와 파멸을 가져 올 수 있음을, ‘목초지와 소’ 우화로 보여 주었다. 금과옥조였던 애덤스미스 ‘국부론’과 상반되는 내용이어서 사회적 파장은 컸다.
'커먼스(Commons)'는 공동체가 사용하고 관리하는 ‘공유자원’으로 풀이된다. 공기, 물, 숲, 대지 등이 포함된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다. 전통적으로 공유자원을 관리하고 분배하는 주체는 마을공동체였다. 마을공동체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어느 순간 해체되었다. 마을공동체가 담당했던 역할은 시장(市場)과 정부가 가져갔다. 개인의 욕망에 기반한 시장경제는 '커먼스'의 비극을 가져 왔다. 정부의 개입도 한계를 보인다. ‘신자유주의’가 실패한 지금, 마을공동체에 주목해 보자.
지구는 모두의 공유자원, '커먼스'다. 기후 이상 변화와 생태 위기는 지구라는 '커먼스'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발생한 현상이다. 지금처럼 시장과 정부에 전적으로 맡기게 되면 근본적인 개선이 어렵다. 공유자원의 운용과 배분에는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어렵고, 정부 행정 메뉴얼도 한계가 있다. ‘제3의 길’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
복원되는 공동체는 이전의 지연, 혈연 공동체와는 다르다. 현대 시민의 상당수는 도시에 살고 있다. 마을공동체는 농어촌, 산촌 뿐 아니라 도시에도 있어야 한다. 마을공동체의 주된 역할은 공유자원의 관리와 배분 그리고 상호부조다. 상호부조는 지역 안전망이다. 현대 시민의 불행은 대부분 ‘분리불안’이 원인이다. 보호받지 못한다는 인식은 각자도생의 무한경쟁으로 이어지며 주변을 볼 수 없게 한다.
현대사회에서 ‘공유자원’은 재규정되어야 한다. 마을공동체가 담당할 공유자원이 무엇인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사회적 합의는 토론이 축적되면서 자연발생 되는 게 아니다.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틀이 있어야 한다. ‘프랑스의 기후변화 시민의회’, ‘캐나다의 온타리오 전기 가격’, ‘호주 멜버른 미래 계획’과 같은 ‘시민의회’를 주목한다.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시민들을 무작위로 선발하여 구성되며, 광범위한 사회적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복잡하고 분열적인 이슈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데 기여한다. 구체적으로 정책 문제와 사회적 이슈를 토론하고 의견을 수렴하여 의회나 행정부에 제안한다. 폭넓은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하기에 정치계와 당국도 무시하기 어렵다. 해외 사례들을 봐도 그렇다.
‘제3의 길’의 실마리를 ‘마을공동체’와 ‘시민의회’에서 본다. ‘시민의회’가 만들어 낸 의제와 의견이 국가 정책에 반영되고, 공동체가 세부 실행을 하는 구조를 만들어보자. 지역 생활에 밀접한 공동체가 행동하고 ‘시민의회’가 견인하는 절차는 우리가 당면한 사회적, 지구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력한 선택지라고 본다.
‘시민의회’는 제안하고 권고하는 수준이 아니라 실질 권한을 일부 위임 받아야 한다. ‘권력 분점’은 법 개정이 따라야 할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를 손질해야 하므로 헌법 수정까지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과정이고, 이해관계 상충으로 많은 장애를 만나게 될 것이다. 선행적으로 ‘권력 분점 시민의회’가 왜 필요한지 시민들의 광범위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사람들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으면 불편해 하고 두려워한다. ‘마을공동체’에서 ‘시민의회’로 이어지는 길은 없었던 그림이다. 인류사에서 거의 모든 혁신은 낯선 장면에서 시작했다. 원래 있던 길은 없다. 사람들이 다니면 길이 된다. 한겨울, 하얀 눈 밑에서 ‘푸른 보리’는 자란다. 마을공동체의 복원과 시민의회가 ‘푸른 보리’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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