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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포럼 | 김우성 | 나뭇가지로 만드는 숲

 

김우성  woosung.kim83@gmail.com  2024. 09. 05.



“아! 벌써 은행이 떨어지네!” 

차에서 내리던 딸이 때 이른 은행나무 열매를 발견했습니다. 지난 밤 세차게 내린 비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여물지는 않았지만 크기가 꽤 큽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폭염과 열대야의 계절, 여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야생 은행나무는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오래 전부터 인간에 의해 심어진 나무입니다. 1100살이 넘는다고 추정되는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 은행나무가 유명한데, 그 유래가 재미있습니다. 신라의 고승인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더니 뿌리를 내려 나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의상대사의 법력(法力)이 그리 대단했던 것일까요?


2008년 봄에 촬영한 용문산 은행나무입니다. 40m가 넘는 거목입니다.

나무의 가지를 잘라 땅에 심은 뒤에 그 곳에서 뿌리가 돋아나게 하는 방법은 꽤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을 꺾꽂이 또는 삽목(揷木, cutting)이라고 부릅니다. 식물의 조직에는 동물의 줄기세포처럼 여러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유조직세포가 존재합니다. 나무의 가지나 줄기를 날카로운 칼로 잘라 땅에 심은 뒤 상처 부위의 유조직세포가 뿌리세포로 분화하기를 기다립니다. 이 과정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땅에 심은 가지의 절단면에서 뿌리가 돋아나면서 한 그루의 작은 나무가 됩니다. 꺾꽂이처럼 씨앗 없이 가지나 줄기, 또는 잎이나 뿌리를 이용해 독립된 개체를 만드는 방법을 영양번식(營養繁殖, vegetative propagation)이라고 합니다. 암술과 수술의 꽃가루가 만나지 않아도 되는 무성생식(, asexual reproduction)입니다. 씨감자로 번식하는 감자, 알뿌리로 번식하는 수선화, 떼로 번식하는 잔디처럼 영양번식은 식물의 다양한 무성생식 방법 중 하나입니다. 암술머리에 꽃가루를 묻혀서 수정하고 씨앗을 만드는 방식과 달리 암수의 유전형질이 섞이지 않기 때문에 특정 식물의 형질을 무한히 복제할 수 있습니다. 우수한 품종의 형질을 유지하거나 대량으로 재생산하는 등 품종의 개발에 유리합니다. 더불어 씨앗으로 번식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묘목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꺾꽃이는 다양한 종의 생산에 널리 활용됩니다.

꺾꽂이는 개나리나 수국, 불두화처럼 씨앗으로 번식하기 어려운 종들을 생산하는 과정에도 자주 사용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개나리나 수국, 불두화는 대체로 불임입니다. 봄의 상징과도 같은 개나리의 꽃은 자세히 보면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암술대가 수술보다 긴 유형과 암술대가 수술보다 짧은 유형입니다. 개나리꽃이 열매를 맺으려면 다른 유형의 꽃이 서로 꽃가루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도시에서 만나는 개나리들은 대부분 암술대가 수술보다 짧은 유형입니다. 개나리들은 매년 봄 전국에 셀 수 없이 많은 꽃을 피우지만 거의 모든 꽃은 수정되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야생에서 자생하고 있는 개나리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주변의 개나리들은 스스로 번식하지 못하고 인간에 의해 꺾꽂이와 같은 방식으로만 번식이 가능합니다. 수국이나 불두화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수국이나 불두화는 진화를 통해 번식을 위한 암술, 수술과 곤충을 유인하기 위한 꽃잎을 분리했습니다. 그래서 꽃차례의 가운데 쪽에는 암술과 수술이 모여 있는 번식 가능한 유성화를 배치하고 꽃차례의 바깥쪽에는 수정의 매개자인 곤충을 유인하기 위해 화려한 꽃잎을 가진 무성화를 배치했습니다. 사람들은 암술과 수술에는 관심이 없고 화려한 꽃잎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시간을 들여 무성화의 비율이 높은 수국과 불두화를 반복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이제 수국과 불두화는 야생에 가까운 일부 품종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화려한 무성화로만 구성된 불임의 꽃이 되었습니다. 향도 풍기지 않고, 곤충이 찾아와도 내어 줄 꿀과 꽃가루도 없습니다. 화려한 꽃잎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 뒤, 사람 손에 의해 영양번식으로만 유전자를 후대에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나리, 수국, 불두화 같은 꽃들은 사람에 의해 전국에 퍼져 살면서 안정적인 개체군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번식에 성공한 것일까요? 


야생의 수국은 꽃차례 가운데 암술과 수술이 있는 유성화가 있고, 꽃차례 바깥쪽에 꽃잎이 크게 발달한 무성화가 있습니다.

꺾꽂이와 같은 영양번식을 통한 증식은 표면적으로 성공적인 번식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해당 종의 유전적 다양성이 낮습니다. 마을에 가득한 개나리들이 알고 보면 한 그루의 개나리 가지를 잘라서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개나리들이 옆마을과 건넛마을을 지나 어디까지 퍼졌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 그루의 개나리인 것 같지만 유전자가 모두 같은 개나리일 수도 있습니다. 유전적 다양성이 부족할 경우 특정 질병에 취약하거나,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야생종의 개나리를 찾아 우리 주변의 개나리들이 유성생식으로 번식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수국과 불두화 또한 야생종이 우리의 산과 들에서 열매 맺으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무성화의 화려함도 좋지만 진화를 통해 만들어진 유성화와 무성화 간 역할 분담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개나리와 수국과 불두화가 자생하지 않는 자생종으로 살지 않게 해주세요.


2006년 봄 북한의 금강산에서 촬영한 야생 개나리입니다. 열매가 달려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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