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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포럼 | 김우성 | 도토리가 만드는 참나무 숲

2024-10-24 김우성  woosung.kim83@gmail.com 

 

“오늘 아침 산속에서 만난 도토리들입니다. 가을이에요.”

“오! 아마도 굴참나무나 상수리나무의 도토리일 것 같네요.”

“다람쥐 먹이 들고 왔는데, 저 혼나야 하나요?” 

아나운서 님께서 도토리 사진을 보내주셨습니다.

지역 방송국의 아나운서 님께서 숲에서 도토리를 주워 오셨는데 혹시나 다람쥐의 겨울 양식이 모자라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모양입니다. 도토리에는 꽤 풍부한 양의 탄수화물이 저장돼 있습니다. 적은 양이지만 단백질도 있고, 지방도 있습니다. 이 소중한 양분은 엄마 참나무가 숲의 바닥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가야 할 새싹들을 위해 준비한 도시락입니다. 우리나라의 숲에는 도토리를 맺는 여섯 종의 참나무가 있습니다. 신갈, 떡갈, 졸참, 갈참, 굴참, 상수리나무입니다. 그 외에도 남부지방에는 상록성 참나무인 가시, 붉가시, 종가시, 개가시나무가 있습니다. 도토리들은 참나무의 종류에 따라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며, 나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수리나무에는 굵고 큰 도토리가 달립니다.

숲의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와도 될까요? 정답은 ‘그때그때 달라요.’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매년 가을 참나무들이 떨어뜨리는 도토리의 양은 꽤나 불규칙합니다. 몇년간 아주 적은 양을 떨어뜨리다가 어느 해 갑자기 굉장히 많은 양의 도토리를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참나무의 불규칙한 종자 생산은 마치 담합이라도 한 듯 같은 지역의 숲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참나무가 함께합니다. 만약 같은 지역의 숲에서 살아가는 참나무 중 어떤 참나무는 도토리를 많이 떨어뜨리고, 다른 참나무는 도토리를 적게 떨어뜨린다면 숲 전체적으로는 매년 비슷한 양의 도토리가 떨어지게 됩니다. 같은 지역의 숲에서 살아가는 참나무들은 도토리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기를 서로 맞춤으로써 명확하게 풍년과 흉년을 구분합니다. 도토리가 흉년이 든 해에는 다람쥐들을 위해 도토리를 양보해야 하지만, 도토리가 풍년이 든 해에는 조금 가져오는 것 정도는 괜찮습니다.  

울주군 소호참나무숲은 작은 동물들의 소중한 서식지입니다.

참나무들은 어떻게 풍년과 흉년을 조절할까요? 다양한 가설들이 있습니다만, 큰 틀에서는 온도와 강수량, 가뭄이나 한파와 같은 기후 신호를 통해 시기를 조율한다고 합니다. 한 지역에 있는 나무들은 비슷한 기후 조건을 경험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비슷한 패턴으로 도토리를 생산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느 해에 비가 충분히 내리면 그 지역의 참나무들이 광합성을 통해 더 많은 자원을 축적하고, 그 이듬해에 대량의 도토리를 생산하는 식입니다. 참나무뿐 아니라 다른 나무들도 뿌리와 뿌리를 연결하는 균근망(mycorrhizal network)을 통해 화학적 신호를 주고받거나, 휘발성 유기화합물(VOCs; Volatile Organic Compounds)을 통해 주변 나무들에게 경고를 보내는 사례들이 보고된 바 있습니다. 나무들은 때로는 수동적으로 때로는 능동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합니다. 


참나무는 왜 이렇게 불규칙한 주기로 도토리를 생산할까요? 참나무들은 도토리를 생산하기 위해 많은 탄수화물을 필요로 합니다. 몇년간 열심히 광합성을 해서 자원들이 충분히 모이면 대량으로 도토리를 생산하고, 이후 몇년간은 다시 자원을 모으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도토리는 다음 세대의 참나무 새싹들을 위해 엄마 참나무가 준비한 소중한 양식입니다. 새싹들에게 꼭 필요한 영양분이 들어 있는 만큼 숲속의 동물들에게도 훌륭한 먹이입니다. 만약 참나무들이 매년 일정한 양의 도토리를 떨어뜨린다면 도토리를 먹이로 삼는 다람쥐나 멧돼지, 어치 같은 동물들은 도토리의 양에 맞춰 최적화된 수의 새끼를 낳고 기를 것입니다. 엄마 참나무가 광합성을 통해 생산한 소중한 도토리들이 어린 참나무가 되기도 전에 숲속 동물들의 먹이로 모두 소진되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나무들은 이러한 결과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나무들은 매년 불규칙한 양의 도토리를 생산하는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가을 다람쥐는 살 찌우랴, 겨울에 먹을 양식 저장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참나무의 도토리 생산량은 다람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어느 해 가을에 참나무들이 충분히 많은 양의 도토리를 떨어뜨린다면 다람쥐들은 풍족한 양의 도토리를 저장할 수 있게 되고 그 해 겨울의 생존율이 높아집니다. 다람쥐는 겨울을 잘 이겨 내고 봄에 충분한 에너지를 축적한 상태에서 번식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도토리가 풍족한 해에는 다람쥐의 번식 주기가 짧아지고, 번식 성공률도 높아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많은 새끼다람쥐가 살아남고, 숲속에는 다람쥐의 수가 늘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듬해에는 참나무가 충분한 양의 도토리를 떨어뜨릴 확률이 낮습니다. 그렇게 되면 숫자가 늘어난 다람쥐들은 굶주리게 됩니다. 충분한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한 다람쥐들은 번식을 연기하거나 출산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또한 먹이가 부족한 겨울에는 어린 개체들의 생존율이 낮아지며, 이는 전체적인 다람쥐 숫자의 감소로 이어집니다. 참나무는 몇년을 기다렸다가 다람쥐의 숫자가 충분히 줄어들면 또 다시 도토리를 잔뜩 떨어뜨립니다. 그해에 잔뜩 떨어뜨린 도토리들은 다람쥐를 비롯한 야생동물들이 배불리 먹고 사람들이 주워 가도 될 만큼 충분한 양이 숲의 바닥에 남습니다. 숲의 바닥에 잔뜩 남은 도토리들이 싹을 틔우고 자라 다음 세대의 참나무가 됩니다. 

등에 선명한 줄무늬가 있는 다람쥐는 한반도에 서식하는 고유종이며, 우리 주변의 숲에서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도토리는 가을의 참나무 숲이 내어 주는 작은 선물입니다. 이름도 귀엽고, 모양도 예쁩니다. 책상을 장식하거나 모양을 관찰하기 위해 두세 알 정도 주머니에 넣어 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토리묵이라도 쑤어 먹으려면 꽤 많은 양이 필요합니다. 도토리묵이 먹고 싶다면 참나무 숲의 바닥을 잘 살펴보세요. 올해는 도토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 잘 모르시겠다면 흉년입니다. 풍년이 올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참나무 숲의 바닥에 도토리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면 축하드립니다. 풍년입니다. 주변 다람쥐들의 눈치를 잘 살피신 후에 작은 주머니에 한 끼 먹을 분량 정도만 가져오시는 것은 어떨까요? 굳이 가져오지 않고 다람쥐에게 양보해 주셔도 좋습니다. 우리는 도토리묵을 먹어도 그만이고 안 먹어도 그만이지만 다람쥐 가족에게는 꽤 소중한 양식이 될지도 모릅니다. 부디 내년 봄에는 숲에서 작은 아기 다람쥐를 많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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