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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포럼 | 김우성 | 비가 만드는 숲

 

김우성  woosung.kim83@gmail.com  2024. 07. 18



비가 내립니다. 숲에 내리는 비는 나뭇잎을 적시고, 나뭇가지와 줄기를 적시고, 땅을 적십니다. 빗물은 땅속을 천천히 흘러 계곡을 채우고 더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비가 지나가고 나면 나무들은 젖은 땅에서 물을 빨아올려 잎으로 보내고, 잎에서는 광합성을 통해 나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포도당을 만들어 냅니다. 나무는 어디에 뿌리를 내릴까요?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립니다. 땅에 있는 물과 무기양분을 흡수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비가 매일 내리는 숲이 있다면 어떨까요? 나무는 굳이 땅에 뿌리를 내릴 필요가 없어집니다. 땅이 아닌 다른 곳에 뿌리를 내려도 뿌리가 마를 즈음에는 다시 비가 내립니다. 

 

열대우림에 가까운 동남아시아에 가보신 적이 있다면 가로수에 붙어 있는 착생식물(着生植物, epiphyte)들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나무의 줄기나 큰 가지에 붙어서 자라기도 하고 노출된 바위에 붙어서 자라기도 합니다. 

열대지방 큰 나무의 줄기와 가지에서 착생식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식물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생태적으로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 광합성을 하는 대부분의 식물은 더 많은 빛을 찾아 더 높은 곳으로 잎을 뻗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높은 곳에 잎을 틔울 수 있다면 그곳에 있는 빛을 독점할 수 있을 테니까요.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잎을 틔우기 위해서는 땅속에 있는 물을 꼭대기에 있는 잎까지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식물들은 오랜 진화의 역사를 통해 관다발과 같은 구조들을 발달시켜 왔습니다. 하지만 착생식물들은 다른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숲 바닥에서 하는 경쟁을 이겨 내려고 스스로 높은 곳까지 자라기 위해 오랜 시간을 견디는 대신, 적당히 높은 곳까지 자란 나무의 가지나 줄기에 뿌리를 내리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깊게 뿌리내리지 않고, 높게 줄기를 뻗어 올리지 않아도 다른 나무가 만들어 놓은 구조에 올라타 광합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흙은 없지만 하늘에서 자주 내리는 비로 뿌리를 적시고, 미생물의 도움을 받아 다른 나무의 표면에서 조금씩 무기양분을 얻었습니다. 일종의 무임승차처럼 큰 나무들이 오랜 시간 만들어 놓은 구조 위에 슬쩍 올라탄 것이지요. 


착생식물은 스스로 큰 줄기를 만들 필요 없이 다른 나무의 줄기에 자리잡고 광합성을 합니다

남들과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착생식물의 삶은 다른 생명체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땅 위가 아닌 공중에 새로운 미세서식지를 만들고 이곳을 찾는 곤충과 새, 양서류를 포함한 다양한 존재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합니다. 착생식물의 꿀과 꽃을 찾는 벌새(Hummingbirds)나 태양새(Sunbirds)들이 이곳을 다녀갑니다. 벌과 개미, 나비와 나방 같은 곤충들 또한 착생식물의 꿀을 찾고, 꽃가루를 나릅니다. 브라질청개구리(Xenohyla truncata)처럼 양서류가 식물의 꽃가루를 나르는 과정에 기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착생식물이 만들어 낸 전략의 다양성이, 서식지의 다양성으로 이어지고, 서식지의 다양성은 생물다양성으로 이어집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올리브등태양새(olive-backed sunbird) (아마도)

열대우림은 생물다양성의 보고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전체 육상생물의 40~75%가 열대우림에서 살아가며, 꽃피는 식물의 2/3가 열대우림에서 발견됩니다. 우리가 생물다양성을 조사하는 기본적인 방법은 단위 면적 안에 얼마나 많은 종이 살아가는지 그 숫자를 세는 것입니다. 한국의 숲 1ha 안에 참나무와 소나무, 철쭉과 진달래 등이 관찰될 때, 비슷한 면적의 열대우림에서는 훨씬 많은 식물들이 관찰됩니다. 수십 미터는 거뜬히 자라는 거대한 나무들이 숲의 뼈대를 이루고 그 나무의 가지와 줄기에서 다양한 착생식물들이 살아갑니다. 그늘을 견디는 작은 나무들, 큰나무의 줄기를 이용하려 드는 덩굴식물들, 다양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난초들이 자랍니다. 이러한 숲의 구조적 다양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동물들이 살아갑니다. 매일 비가 내리는 숲에서는 큰나무의 옹이구멍이나 식물의 잎자루 틈에 있는 작은 웅덩이도 마르지 않습니다. 브로멜리아드(Bromeliad)라는 식물은 잎자루의 틈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브로멜리아드 나무 개구리는 그 웅덩이에 알을 낳아 올챙이를 키웁니다. 나무 한 그루에 여러 종의 개미 군락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열대우림의 많은 동물들은 나무에서 태어나 평생 한번도 땅에 발을 딛지 않고 나무 위에서만 생활합니다. 


말레이시아의 숲에서 아내님과 저는 열대우림의 생물다양성을 느낍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열대우림 매년 1750~3000mm의 비가 내립니다. 풍부한 물과 빛, 따뜻한 온기를 바탕으로 생물다양성이 폭발합니다. 서식지로서 열대우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열대우림과는 조금 다르지만 지금 창밖에 내리는 비 또한 우리 숲의 생물다양성을 만들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숲의 나무와 풀, 곤충과 개구리들이 빗속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날 우리의 삶도 안전하고 낭만적이기를 바랍니다.


울산의 입화산에서 만난 큰산개구리 (이름은 큰산개구리지만 아직 어려서 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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