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1 김우성 woosung.kim83@gmail.com
설악산에 첫 눈이 내렸습니다. 추운 계절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산꼭대기에서 산 아래로 찾아옵니다. 나무들은 올해의 성장을 마무리할 준비를 합니다. 나무들은 줄기 또는 뿌리에 내년을 위한 양분을 저장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씨앗을 떨굽니다. 갈잎나무들은 겨울에 쓰지 않는 잎을 떨구고, 늘푸른나무들은 잎을 단 채로 긴 휴식에 들어갑니다. 숲의 겨울은 휴면의 계절이고, 죽음의 계절이며, 세대 전환의 계절입니다.
우리나라보다 더 추운 지역의 숲에서 살아가는 나무들의 삶은 어떨까요? 모진 환경을 견뎌 내며 작고 구불구불하게 자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보다 추운 러시아나 캐나다에는 크고 곧게 뻗은 상록성 침엽수들이 끝없이 펼쳐진 북방수림(北方樹林, boreal forest), 타이가(Taiga) 숲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타이가 숲은 겨울이 길고 혹독하며, 여름이 짧습니다. 한겨울에는 기온이 영하 50°C까지 떨어집니다. 서늘한 타이가 숲에는 가문비나무와 전나무 낙엽송들이 자라는데, 높이가 작게는 20m부터 크게는 60m까지 자라 큰 숲을 이룹니다.
서늘한 타이가 지대의 숲은 어떻게 그런 멋진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요? 타이가 숲이 위치한 러시아나 캐나다는 춥고 건조합니다. 우리나라 겨울도 그러하듯이 온도가 떨어지면 대기 중에 떠다닐 수 있는 수증기의 양이 줄어듭니다. 자연스럽게 강수량도 줄어듭니다. 타이가 숲의 겨울은 늘 눈으로 덮여 있는 것 같지만 실제 연강수량은 불과 200mm~750mm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연강수량이 1300mm정도니까 우리나라의 절반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비와 눈이 내리는 숲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가 숲의 바닥은 늘 축축하고, 습지도 넓게 발달해 있습니다.
이 풍요로운 타이가 숲의 물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타이가 숲은 적도에서 멀고 북극에 가깝습니다. 이 지역은 태양이 머리 위에 있지 않고 지평선 가까이에 비스듬히 떠 있습니다. 정오의 햇살이 아닌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치는 생태계입니다. 비록 강수량은 적지만 햇살이 강하지 않고 온도가 낮아 증발량 또한 적습니다. 타이가 숲에 내린 눈과 비는 숲의 바닥에서 오래 머물게 됩니다. 숲의 바닥은 늘 축축한 상태로 유지되고, 나무들은 충분한 물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타이가의 숲에서 부족한 자원은 물이 아니라 빛입니다. 나무들은 충분한 물을 바탕으로 빛을 찾아 높이 또 높이 자랍니다. 세대를 거치며 부족한 빛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그늘에서 오래 잘 견디는 방향으로 진화를 계속합니다. 타이가 숲의 바닥에서 자라는 어린 나무들은 아주 짙은 그늘 속에서도 몇 년이고 버틸 수 있습니다. 십수 년을 그늘에서 견디며 아주 천천히 자라는 나무들도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늘을 드리우던 큰 나무가 죽거나 쓰러지면서 숲에 틈이 생기면 때를 기다리던 어린 나무들은 숲 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향해 빠르게 자라 그 공간을 채웁니다.
타이가 숲의 바닥은 마치 서늘하고 축축한 냉장실의 야채칸과 같습니다. 미생물의 활동이 더딜 수밖에 없는 환경인 타이가 숲의 바닥에서는 나무들이 떨어뜨린 잎과 가지가 아주 천천히 분해됩니다. 열대림에서는 낙엽이 분해되는데 불과 몇 달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따뜻한 온도, 높은 습도, 다양하고 복잡한 미생물 군집이 관여함으로써 유기물의 분해 과정이 아주 빠르게 진행됩니다. 한국의 숲과 같은 온대림에서는 약 2년 정도가 걸립니다. 하지만 한대림에서는 유기물의 분해 속도가 훨씬 느립니다. 낙엽이 분해되는 데 5~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침엽수의 잎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유기산은 타이가 숲의 토양을 산성화시킵니다. 토양의 산성화로 인해 미생물의 활동은 더욱 제한됩니다. 숲의 바닥에는 분해되지 않은 유기물이 아주 두껍게 쌓이게 되고, 그 아래로는 회백색 표백층과 갈색 집적층으로 이루어진 포드졸(Podzol) 토양이 형성됩니다. 이 토양은 강한 산성을 띠며, 양분이 부족해 작물을 재배하는 데 적합하지 않습니다. 오랜 진화의 시간을 거쳐 이러한 환경에 적응한 타이가 숲의 침엽수들만이 포드졸 토양 위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타이가 숲은 지구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육상생태계의 유형입니다. 전 세계 숲의 27%인 1700만 ㎢를 차지하며, 이는 북반구 육지 면적의 11%에 해당합니다. 이 넓은 땅이 농경지로 개간되지 않고 여전히 숲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토양이 작물의 재배에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산성을 띠기 때문입니다. 타이가 숲은 빙하기가 끝난 이후부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끝 없이 펼쳐진 대지 위에 셀 수 없이 많은 나무를 키워 내고, 숲의 바닥에는 두꺼운 유기물층이 깔려 있습니다. 이 모든 곳에 탄소가 저장돼 있습니다. 망가진 탄소의 순환으로 인한 기후변화에 직면해 있는 지구에게 타이가 숲은 너무나도 소중한 탄소의 저장고입니다.
하지만 타이가 숲은 기후변화의 시대에 거대한 위기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타이가 숲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증발량도 함께 증가하고 있습니다. 숲은 점점 건조해지고, 습지는 사라져갑니다. 침엽수 숲은 송진을 잔뜩 머금은 거대한 연료 창고로 변해 버렸습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드넓은 타이가 숲에 산불이 시작되면 끌 방법이 없습니다. 세계산림감시(Global Forest Watch, GFW)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22년까지 산불로 가장 많은 숲을 잃어버린 나라는 러시아이며, 다음은 캐나다입니다. 러시아는 지난 20년간 매년 2만5400㎢의 숲을 잃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면적 4분의 1 정도입니다. 지난 20년간 러시아에서만 남한 면적의 5배가 넘는 숲이 사라졌습니다. 거대한 숲이 불타고,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지구가 더워지면서 다시 더 큰 산불이 발생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없는 고요함의 숲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숲을 더 잃게 될까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타이가 숲이 앞으로도 오래오래 건강하게 그곳에 있어 주기를 바랍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