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쿠쇼토의 중심 섬 혼지마는 자치권을 가진 수군의 거주지였던 역사, 국가가 지정한 채석장, 능숙한 항해 기술 등 혼지마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찾아간다.
2025-03-13 제종길, 이응철, 고은정
제종길 13대 안산시장, 17대 국회의원, 해양학 박사
이응철 전 일본 국립사가대학교 교수, 농학박사·보건학 박사
고은정 전 수원시 디자인기획관, 도시공학박사
제법 큰 건물, 잘 정렬된 야자나무 가로수
지명에 ‘혼(本)’이 들어가면 중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우리말로 ‘본도’라는 섬 이름을 보는 순간 범상찮은 섬일 것이라 생각이 바로 떠올랐다. 우리나라에서도 본동이 있는 지역에서는 지역의 중심지이거나 처음 동네가 시작된 행정 구역을 지칭한다고 알고 있다. 마루가메(丸亀)시의 항에서 약 10km 떨어진 혼지마(本島)로 가는데 제법 큰 여객선으로 30여 분이 걸렸다. 섬의 주항인 토마리(泊)항을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선입관이 생겨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에 충만했다. 다가서면서 보니 마을이 상대적으로 품위가 있어 보이고, 섬답지 않게 큰 관공서 같은 건물들도 있었다. 야자나무 가로수도 잘 정렬되어 있었다. “역시 혼지마!”



섬 동편에 세 동네
그랬지만 막상 섬을 걸어 다니면서 돌아갈 배 시간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감상하자니 마음이 바빴다. 작품 설명 해설자가 안내하는 이야기조차 머릿속에서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어쨌든 다른 섬과 격이 다른 것은 맞았고, 섬에 전시된 작품은 모두 동편에 있는 세 동네—토마리, 코쇼(甲生), 가사시마(笠島)에 있었는데 서로 가까웠다. 그중 가사시마는 오래된 양반가 집성촌처럼 보였고, 집과 마을 길이 깔끔하고 잘 정리되어 있었다. 마을 입구 입석에는 ‘시와쿠혼지마쵸 가사시마 전통 건축물 보존지구(塩飽本島町笠島伝統的建造物群保存地区)'라고 적혀 있었다. 국가가 지정한 중요 사적지인 것이다.

소금 생산 방식과 빠른 조류
현지에서도 그랬지만 돌아와서 원고를 준비하면서도 혼지마면 혼지마지 왜 ‘시와쿠혼지마’인지 궁금했다. 섬에서 본 지명에도 혼지마라고 쓴 것보다는 시와쿠를 붙여 쓴 것이 많았다. 혼지마가 ‘비산쇼토(備讃諸島)’의 서쪽 섬들인 시와쿠쇼토(塩飽諸島) 28개 섬 가운데 하나인 것은 맞는데 왜 이 섬에만 그 이름이 붙었을까 하며 궁금했던 것이 글을 쓰면서 슬슬 이해되었다. 가사시마의 고급 주택단지와 혼시마의 ‘혼(本)’까지 엮어 생각하다 보니 다 연결이 되었다. ‘쇼토’는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여러 섬의 모여 있을 때 지칭하는 명칭이다. 혼지마를 비롯하여 이웃한 여러 섬들인데 지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좁은 수로에 몰려 있으니 조류가 빠를 수밖에 없다. 시와쿠라는 말도 이 일대의 특이한 소금 생산 방식과 빠른 조류에 그 어원이 있다고 한다. 앞의 연재 샤미지마 편에서 서쪽의 예술제 섬들이 다 포함된다고 하였지만 잘못 기술한 것이었다. ‘타카미지마(高見島)’와 ‘아와시마(栗島)’는 포함되지만, 서쪽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는 ‘이부키지마(伊吹島)’(연재 ‘세토우치 트리엔날레에 가자’ ⓵의 포스터 참조)는 아니었다.



항해 기술에 능했던 섬 주민들
혼지마는 제도의 중심 섬이었고, 거친 조류에 익숙한 주민들은 기본을 갖춘 수군 깜일 수밖에 없었다. 배의 조타에 능한 섬 주민들은 항해 기술을 높이 평가받아, 16세기 전국 시대에는 ‘시와쿠스이군(塩飽水軍)’으로 전선의 선원으로 활약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이래, 토지와 자치권을 가진 닌묘(人名)를 선정하여 이 지역을 관할하는 제도가 생겼다. 전체 섬에 650명 있었고, 이들로부터 선출된 4명의 ‘토시요리(年寄 실무책임자)’에 의해서 정치와 행정이 행해졌다. 메이지유신(1868)까지 닌묘의 자치가 계속되었다. 토시요리들이 행정업무를 본 일종의 관청인 ‘시와쿠긴반쇼(塩飽勤番所)’가 지금도 혼지마에 남아 있다. 이렇게 자치권이 인정되자 혼지마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가 발전했으며, 권한을 가진 수군들의 주 거주지이자 조선업의 요지가 사카지마인 것이다. 이곳에는 100년이 넘은 주택들이 많다.
국가가 관리하던 채석장
행정적으로 혼지마는 가가와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인 마루가메시 혼지마쵸(本島町)의 섬으로, 면적은 6.74㎢으로 나오시마의 반보다 약간 작다.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하고 그 둘레는 16.4km나 된다. 해안에는 수려한 모래 해안이 발달하여 인기 있는 해수욕장이 여러 개 있다. 섬의 최고봉은 해발 214m의 ‘코자카야마(小坂山)’이다. 또 혼지마는 ‘돌의 섬’으로도 유명하다. 이 돌들이 오사카성 등을 축조하는 데 쓰였는데 채석은 가사시마 마을 뒤편에 있는 ‘타강보야마 이시키리초바(高無坊山 石切丁場)’라고 하는 산의 채석장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은 역사적 명소로서 일본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세토나아카이에 있는 섬의 돌들이 다 우수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채석장을 국가가 관리할 정도이니 혼지마의 돌이 최고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예술제 작품 중에 돌과 채석에 관련된 것이 다섯 개나 있었는데 모두 가사시마 마을의 주택에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도 인구 감소가 빠르게 진행 중
혼지마의 인구는 1970년에 1818명이었고, 여러 기록에 나타난 인구를 살펴보면 2018년에 333명, 2022년에 174세대 292명이었으며, 2024년엔 262명으로 나와 있었다. 2022년 당시 65세 이상 주민이 176명으로 전체 60%였고, 14세 이하는 약 5%에 불과하였다. 안타깝지만 여러 가지 역사 유산이 많고 자연환경이 좋아 관광객이 자주 찾는 혼시마에도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네덜란드 증기선 군함, 칸린
예술제의 작품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항구가 있는 토마리를 비롯한 세 동네에 집중되어 있다. 토마리 마을에는 작품을 나타내는 점이 아홉 개이지만 작품 수는 세 개—ho01, ho05, ho06 뿐이다. 이유는 작품 ho05가 일곱 곳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일본 작가 무라오 카즈코(村尾かずこ)의 ‘석고에 그림 그리기 프로젝트(漆喰・鏝絵かんばんプロジェクト)’이다. 섬의 전설이나 섬이 번창했을 시절의 이야기들을 작은 석고판 위에 그림을 디자인하여 민가 처마 밑에 붙여 놓은 프로젝트였다. 사진을 참조하며 읽기 바란다. 토마리 마을의 다른 작품 ho6에서 칸린은 선박의 이름인데 이 배의 항해일지가 시와쿠쇼토를 관리하던 건물에 전시해 놓은 정도로 일본에서 역사성이 있는 선박이다. 네덜란드에서 가져온 군함으로 일본에서는 두 번째 증기선이었다. 혼지마에 설치된 작품들은 모두 선박과 돌이 주제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와쿠혼시마’의 자긍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지역에서 전수되어 온 뛰어난 조선과 건축 기술이 바탕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마루가메시에는 일본에서 제일 큰 조선소가 있다.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벽화
혼지마의 토마리항에 내려서면 바로 자전거를 빌려주는 곳이 보인다. 이곳을 자주 온 사람들은 줄 서서 자전거를 빌렸다. 우리도 망설였지만 지리를 완전히 알지를 못해 걸어서 돌아보기로 했다. 걸어서도 지루하지 않게 세 마을을 편하게 다닐 수 있었지만, 자전거가 있었다면 구석구석을 더 살펴볼 수 있었을 것이다. 평탄한 길이었고, 잘 정리되었으며 차도 적어 안전하였다. 특히 동쪽 해안도로에서는 ‘세토오하시(세토대교)’와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함께 즐길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이곳도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아기자기한 소품들이나 벽화가 마을 더 예쁘게 했다. 마치 별장 촌으로 여행온 느낌이라고 할까? 혼지마에도 ‘다코메시(문어밥)’를 파는 집이 있고 문어가 그려진 담 벽화 광고도 여럿 있었다. 문어가 주민 생활에 익숙할 정도로 잡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된 어업 대상이라거나 주 수입 어종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섬의 북쪽에 있는 일반 어민들이 사는 어촌에는 어떤 수산물이 잡히는지 못내 궁금하다.

좋은정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