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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권의 동아시아 종과 횡 | 삼각관계의 지정학

 

1945년 이후 동아시아 각국의 관계 변화를 삼각관계의 로맨스와 비교해 살핀다.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일소공동선언, 중일국교정상화, 한일국교정상화의 과정에서 한, 미, 일, 중, 소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전개된다.

2025-1-10 송병권


송병권 상지대학교 교수는 2011년 일본 토쿄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미일 관계를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7년간 편사연구사로 일했고, 다음 7년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와 한국사연구소,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2020년에 상지대학교에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근현대 동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지역주의, 지정학, 경제사, 정치사상, 국제관계사를 주로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현대 동아시아 지역주의: 한미일 관계를 중심으로』(2021), 『동아시아, 인식과 역사적 실재: 전시기에 대한 조명』(공편저, 2014), 『근대 한국의 소수와 외부, 정치성의 역사』(공저, 2017) 등이 있고, 번역서로 『일본 근대는 무엇인가』(공역, 2020), 『GHQ: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2011) 등이 있다.


 

깻잎 떼어 주는 사이


여기 두 남자가 있습니다. 남자 A에게는 절친 여사친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다른 남자 B와 이른바 깻잎을 떼어 주는 사이가 될 가능성이 보입니다. 이른바 삼각관계입니다. 남자 B는 사실 남자 A보다는 절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여자가 남자 A에게만 눈길을 주기를 원치는 않으므로, 앞으로 깻잎을 떼어 주는 사이가 되길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남자 A나 B, 혹은 여자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갑자기 막장 분위기가 되어버렸지만, 사실은 국제관계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고, 이것은 동아시아를 둘러싼 여러 장면에서 연출된 모습이기도 하다. 상황에 따라 세 배역에는 미국, 소련(지금은 러시아), 중국, 한국, 일본 등이 돌아가며 캐스팅되기도 한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945년 이후 첫 번째 삼각관계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년)에서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반부를 달리던 1944년 9월에 패색이 짙어진 일본은 소련에 접근하여, 소련과의 ‘공동선언’을 통해 안정적인 종전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남자 A와 B는 돌이킬 수 없는 대립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여자는 어느 한쪽만을 선택해야 했다. 패전 이후 미국의 실질적인 단독 점령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적극적으로 임했고, 결국 1952년에 소련의 보이콧 속에서 연합국 중 미국을 중심으로 강화회의를 맺음으로써 미국의 점령 상태를 종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시기에는 미국과의 전쟁 속에서 소련에 접근하면서 종전을 도모했으나 실패하였지만, 결국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 대륙세력 소련을 봉쇄하려는 해양세력 미국의 교두보로서 일본은 새 출발하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48개국이 참가해 서명하여,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었다. 사진_위키미디어 커먼즈

1956년 일소공동선언


두 번째 삼각관계는 일본이 소련과 국교 정상화에 성공한 일소공동선언(1956년)에서 나타났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은 여전했으나, 데탕트 국면도 일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미국의 절대적 영향권 아래에서의 안전보장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완전한 비대칭적인 종속관계보다는 상대적인 자율성을 확보하고 싶었다. 이와 결은 조금 달랐으나 일본의 전통적인 시장이었던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를 심화시키고, 미일 경제관계를 일정 정도 이완시키고, 가능하다면 일본 공산주의 진영의 영향력을 고양시키려는 전략적 선택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 했던 소련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적극적이었다. 1955년경부터 시작한 소련과의 국교 정상화 교섭의 결과 맺어진 소련과의 국교 정상화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결여된 소련과의 종전 문제를 해결하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순간에 소련군에 의해 점령된 홋카이도 이북의 이른바 ‘북방영토’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이는 하보마이 제도와 시코탄 섬까지는 일본에게 돌려줄 용의가 있었던 소련과 이에 대한 수용 여부를 두고 내적 갈등을 겪었던 일본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의 갈등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쿠나시리와 에토로후라는 두 섬의 일본 귀속 여부에 대해 미국이 적극적인 개입을 함으로써 소련을 견제했던 장면도 연출되었다. 결국 ‘북방영토’ 문제를 연계하지 않은 채 일소공동선언에 합의함으로써 일본은 국제연합 가입 신청을 앞두고 소련의 반대에 고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소련은 1955년에 유럽에서도 서독과 국교를 재개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을 고뇌에 빠지게 했던 지정학적 악몽인 두 개의 전선 문제를 일정 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즉, 여자는 두 남자의 갈등 관계를 잘 활용하여 원하는 바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일소공동선언은 1956년 10월 19일 일본과 소련이 모스크바에서 서명하고, 같은 해 12월 12일 조약을 발표했다.

1972년 중일국교정상화


세 번째 삼각관계는 1972년 중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나타났다. 고도성장 속에서 해외시장을 확대할 필요가 있었던 일본은 친콤(CHINCOM) 등과 같은 미국의 강력한 통제하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중국과의 교역 제한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일본은 두 개의 닉슨 쇼크에 놀라게 되는데,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무역의 확대를 위해 자국경제를 개방했던 미국이 자국의 높은 인플레이션과 무역 적자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금본위제 포기를 결정했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의 가장 강력한 공산국가인 중국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방문한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일본은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을 전제로 미국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대외정책을 수립하고 전개해 왔는데, 이제 미국의 일관된 태도를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위기 속에서 일본은 기회를 재빠르게 포착하여 1979년에야 중국과 국교를 수립한 미국보다도 먼저 1972년에 중일국교정상화에 성공하였다. 미국은 중소 대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북베트남의 배후에 있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주목하였고, 이를 통해 북베트남에 배후에 중국과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치군사적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철수할 수 있는 계기를 안정적으로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비록 베트남전쟁에서는 미국이 기대했던 결과까지는 얻지 못했지만, 중국과의 관계 개선은 소련과의 관계에서 미국의 주도권을 확대하는데 충분히 효능감을 주는데 성공했으므로, 미국은 일본이 중국과 국교 정상화하는 것을 굳이 통제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하면서 중국과의 종전 문제를 일정 정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자 B와 사이가 좋지 않은 새로운 남자 C의 등장과 이 A와 C 두 남자의 공동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여자는 자신의 자율성을 확대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중일국교정상화는 1972년 9월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국교를 수립했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마지막 삼각관계는 1965년에 있었던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였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 개별적으로 동맹관계를 형성하여, 해양세력 미국을 위한 두 개의 교두보를 형성했지만, 국교조차 수립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동아시아 지역은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이 집단안보라는 틀로 완결되지 않은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지역통합정책을 추진했던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속에서 한일 양국이 국교를 수립하였으나, 군사적인 동맹관계는 결국 만들어지지 않았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대륙세력을 봉쇄할 전진기지로 한국과 일본 모두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나, 한일 양국은 미국에게 자신이 더 중요한 존재임을 부각시키고자 경쟁하게 되었다. 사이가 나쁜 두 남자의 한 여자에 대한 구애는 각각 절실했으나, 여자가 요구한 두 남자의 화해는 해결되지 않은 채 어설프게 나눈 악수를 풀기도 어려운 사이가 되어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면서 한일 간 국교정상화가 이뤄졌다.


현실주의적 이해타산과 이상주의적 상호협력이 필요한 시점


최근의 동아시아 지역에서 드러나는 양상은 더욱 복잡하다. 자국중심주의에 더욱 경도된 미국의 등장, 지역패권국가로 그 모습을 드러낸 중국, 여전히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중시하면서도 상대적 자율성을 높여가려는 일본,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한 북한, 그리고 한미동맹에서 한미일 동맹으로 달려갔던 한국. 이제는 삼각관계를 넘어서 더 복잡한 막장 드라마가 펼쳐질 가능성도 있다. 막장 드라마에서 모두가 좋은 결말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가져올 것인지 철저한 현실주의적인 이해타산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고, 힘이 아닌 법과 제도에 의한 평화를 동아시아 지역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이상주의적 상호협력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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