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이후 미국, 소련, 중국과 펼친 외교 정책의 흐름을 살펴본다. 일본이 유일합법정부를 요구하는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이중대표 전략을 썼는데, 한반도를 둘러싼 '두 개의 코리아' 경향에 시사점을 준다.
2025-2-14 송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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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권 상지대학교 교수는 2011년 일본 토쿄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미일 관계를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7년간 편사연구사로 일했고, 다음 7년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와 한국사연구소,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2020년에 상지대학교에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근현대 동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지역주의, 지정학, 경제사, 정치사상, 국제관계사를 주로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현대 동아시아 지역주의: 한미일 관계를 중심으로』(2021), 『동아시아, 인식과 역사적 실재: 전시기에 대한 조명』(공편저, 2014), 『근대 한국의 소수와 외부, 정치성의 역사』(공저, 2017) 등이 있고, 번역서로 『일본 근대는 무엇인가』(공역, 2020), 『GHQ: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2011) 등이 있다.
유엔은 원래 '연합국'이란 말이었다
유나이티드 네이션즈(United Nations)를 우리는 보통 유엔(UN)이라고도 한다. 맞다, 예전에 반기문씨가 사무총장을 역임했던 바로 그곳이다. 원래 유엔은 연합국이란 말이었다. 중국어로 유엔을 연합국(联合国, Liánhéguó)이라고 번역하고, 북한에서도 련합국기구라고 번역한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국제연합(国際連合)이라고도 번역한다. 우리나라에서 국제연합이라고 번역하는 경우, 일본어를 차용해서 사용하고 있는 셈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추축국(Axis powers)이라 불렀고, 이에 대항한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을 중심으로 뭉친 국가군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고안한 명칭이 바로 연합국이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45년 4월부터 6월에 걸쳐 ‘국제기구에 관한 연합국 회의’에서 유엔헌장을 작성하였고, 전쟁이 끝나고 두 달이 지난 10월 24일 공식 출범하였다. 패전 이후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사령부는 정확히는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였던 것이다.
유엔을 '국제연합'으로 번역한 이유
이야기를 돌려서 일본이 유엔을 국제연합으로 번역한 데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설립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과는 다른 이유가 있다. 국제연맹 당시에는 전승국의 일원으로 참석했던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연합국 즉 유엔이 아니라 추축국에 속해 있었다는 사정이 있었으므로, 전쟁에 패한 추축국의 멤버였던 일본이 승전국으로 이루어진 연합국에 가입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개념상의 곤란함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유엔의 첫 번째 번역어인 연합국이라는 개념을 대체하기 위해 국제연합이란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연합국의 점령에서 벗어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
반절만의 연합군 점령 종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바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 상태를 종결시키는 것이 필요했고, 그 결과로 연합군의 점령도 종결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사실 연합국을 주요 구성국이었던 미국과 소련 사이의 세계적 수준의 냉전과 동아시아에서 중국 대륙에서 공산정권이 수립(중화인민공화국)과 국민당 정권의 타이완 이동(중화민국), 한반도에서의 전쟁 중에 미국을 중심으로 일본과의 조기 강화라는 흐름 속에서 단행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의 전쟁 당사국이었던 중국이 대표권 문제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모두 참석하지 못했고, 소련은 참석은 했으나 서명에는 참여하지 않아, 전쟁 종결에 매듭을 지을 수 없었던 절반의 강화조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독립을 달성한 일본에게 남은 문제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로 점령 종결과 더불어 독립을 달성한 일본에게는 몇 가지 문제가 앞에 놓여 있었다. 먼저, 강화조약 체결로 전쟁상태를 종결한 미국과의 관계에서 오키나와 등 일본의 영토가 여전히 미국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으므로, 점령이 완전히 종료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소련과의 관계에서 이른바 ‘북방영토’가 소련의 점령하에 놓여 있었는데, 공식적으로는 국교 단절 상태이면서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중국과의 관계도 상당히 복잡했는데, 중국의 분단으로 인해 평화조약을 체결해야 할 국가가 둘이나 존재했으며,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모두 ‘하나의 중국’ 정책으로 중국대표권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화민국를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하고도 '정경분리'
중화민국은 미국 측과의 연합국을 형성하고 있었고, 유엔에도 당연히 참여하였으며, 심지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기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유엔에 비가입 상태였고, 소련 진영에 가담한 채 미국과는 대립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미일안보조약과 결합되어 일본에게 있어서 미국은 일종의 상수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중국이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일본에 좀 더 요구할 것이 많았겠지만, 중화민국도 중국의 유일대표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중화인민공화국과 경쟁해야 했으므로, 1952년에 일본에게는 너무도 관대한 방식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중화민국이 일본에게 요구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중국에서의 유일합법정부로서 대표권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과의 평화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정경분리론’을 주장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중화민국에 중국대표권을 인정하면서도,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민간루트를 통한 교류를 계속하였다. 사실상 두 개의 중국과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소련과 '북방 4도 반환' 문제
1950년대 당시에 유엔에 가입하지 못한 일본으로서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소련과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관계를 정상화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소련과의 사이에는 이른바 ‘북방영토’라는 문제가 가로놓여있었는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이 방기(放棄)하기로 한 치시마/쿠릴열도에 포함 여부를 두고 4개의 섬(과 그 부속 도서)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소련은 전략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2개 섬을 반환하는 것으로 평화조약을 맺고, 전략적 가치가 높은 남은 2개 섬과 남사할린에 소련 주권을 확인하고자 했다. 일본도 초기에는 2개 섬의 반환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일본 국내 여론과 집권 자민당에서 4도 반환이란 강경론이 우세해짐으로써, 결국 평화조약 체결에 이르지는 못한 채, 공동선언의 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고, 향후 평화조약 교섭을 진행하기로 약속하였던 것이다.
미국과 '오키나와 반환' 문제
일본 외교에서 상수로 등장하는 미국도 여기에 중요한 이해관계가 있었다. 만약 소련이 점령한 북방 4개 섬을 일본에 반환하게 되면, 미국은 상당히 곤란한 문제가 발생한다. 즉, 오키나와 제도를 여전히 점령하고 있었던 미국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을 미국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전략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오키나와 제도 북쪽에 있는 아마미 제도를 조기 반환함으로써 소련을 압박하면서, 법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북방 4개섬이 모두 일본영토라는 정치적 지지를 일본에 보내게 된다. 소련과의 평화조약 체결에는 비록 실패하였으나, 일본은 소련의 승인하에 유엔 가입에는 성공하여, 국제무대에 명실상부하게 등장할 수 있었고, 당연히 대표권을 향유하게 되었다.
1970년대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정상화
1970년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정상화는 이미 체결한 중화민국과의 평화조약과 트레이드오프 관계에 놓여 있었다. 두 개의 중국 정부 모두 ‘하나의 중국’론에 입각해 있었으므로, 일본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게 되면, 중화민국과는 국교를 단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타이완 문제’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정상화교섭에서 핵심 과제였다. 한편, 오키나와 반환과 중소 분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정부간 교섭을 시도한 미국 요인도 국교정상화 교섭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오키나와 반환 과정에서 미일안보조약에서 타이완의 안보는 일본의 안보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타이완조항’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대신하여 일본이 타이완의 안보에 관여하게 될 가능성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이중대표제와 잠정협정 전략 포기
한편, 일본도 미중 접근 과정에서 소외되는 충격에 대한 대응으로 ‘하나의 중국, 하나의 타이완’론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즉, 유엔에서의 중국대표권 문제에서 이미 가입되어 있는 중화민국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도 가입하는 ‘이중대표제’를 외교전략으로 상정하여, 이른바 ‘잠정협정(Modus Vivendi)’을 추진했던 것이다. 중소 대립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은 미일안보조약을 받아들이면서 ‘타이완 조항’에 대한 미일동맹을 인정하면서도, ‘하나의 중국’론에는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일본은 ‘잠정협정’ 전략을 포기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 가입하자 중국의 유일대표권을 인정하고, 유엔에서 탈퇴한 중화민국과의 국교를 단절하는 정책으로 기울게 되었다.
북한의 '두 개의 코리아론' 움직임
유일대표권이란 용어는, 우리에겐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라는 용어와 비슷한 울림을 가진다. 한반도에서도 남북 모두 ‘하나의 코리아’론을 주장하면서, 북한과 국교를 수립한 나라와는 국교 수립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한 적도 있었다. 닉슨 쇼크는 한반도에도 크게 영향을 끼쳐 <모가디슈>라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동시 수교도 마다하지 않는 경쟁에 돌입하였지만, 국제적으로 ‘이중대표제’를 용인하는 흐름이기도 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완화책으로 제시된 교차승인론의 영향 속에서 한국은 공산권 국가인 중소와 국교를 수립하였는데, 북한은 미일과 국교 수립을 추구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렇지만, 유엔에 남북이 동시에 가입함으로써 유엔에서의 유일대표권은 남북 모두 주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의 한반도 정세를 살펴보면 북한에서 남조선 혹은 남측이라 부르지 않고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남북한의 특수관계에서 벗어나겠다는 움직임마저 보인다. ‘하나의 코리아’론을 부정하고 ‘두 개의 코리아’론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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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