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정 기자 2024-08-23
윤영배는 우음도가 고향으로 현재 화성연안환경문화연대 회장이다. 시화지속발전협의회 민간위원, 수원전투비행장반대 대책위원회 고문, 시화지구 어촌계 협의회장, 시화유역관리위원회 위원, 송산발전협의회 자문위원장, 우음도 어촌계장, 우음도 당제보존 회장, 우음도영농법인 대표, 우음도환경학교 운영위원장, 풀뿌리환경센터 공동대표 등을 맡았다.
음도는 나의 고향이다
음도가 내 고향이다. 그 당시에 36가구 정도 살았다. 120년 전 우리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여기로 와 살기 시작했다. 음도는 옛날에 궁지기를 둬서 잡은 수산물을 건어물로 말려 궁으로 올려 보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산 지 꽤 오래된 동네다. 우리 집은 8남매다. 나는 음도에서 태어났다. 송산초등학교 우음분교에 다녔다. 학생은 50~60명인데 선생님은 한 분이셨다. 고학년 학생들은 선생 노릇을 해야 했다. 5학년은 1학년 가르치고, 6학년은 2학년 가르치고, 3~4학년은 선생님이 가르쳤다. 그렇게 오전이 끝나면 선생님이 오후부터 5~6학년을 가르쳤다. 중고등학교는 서울 마포의 동도중학교, 동도공고(지금의 서울디자인고등학교)에서 다녔다.
어촌계원이 되다
나는 원래 공업인이고 기술자다. 어린이날 그 당시 대통령이 ‘어린이들을 위한 게임기를 왜 한국에서 만들지 못하냐’ 하면서 기술자를 양성하라고 했다. 3대 1의 경쟁률로 60명 안에 선발되어 거기서 기능사 자격증도 따고 기술을 배웠다. 인도네시아에 앨범 찍어 내는 공장도 내서 거기서 일하며 돈도 엄청나게 벌었다. 그런데 1997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음도로 다시 돌아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우리 큰형도 일주일만에 돌아가셨다. 그때 어머니가 음도 어촌계원이셨는데, 형님도 돌아가셔서 가장인 내가 어촌계원이 됐다. 재산상속으로 집은 내가 받고 땅 등을 정리한 후 인도네시아로 다시 가려고 했는데 대부도 사태가 터졌다. 이종형이 대부도에 사는데 데모를 하길래 쫒아 가보니 시화호를 막으면서 어업보상만 하고 땅이나 집 보상은 안 했다.
법정 싸움을 시작하다
처음에 시화호를 막을 때는 좋았다. 서울에서 음도로 한번 들어가려면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었다. 안산에 와서 물때가 안 맞으면 육지에 있는 친척집에 있다가 다음날 가야 했다. 그런데 저걸 막아서 집에 아무 때나 갈 수 있게 돼서 좋다고 생각되었다. 환경, 이런 건 생각도 안하고 그랬다. 1987년도부터 막아서 1988년도에 1차 어업보상이 800만 원이 나왔다. 우음도 앞으로 2억2000만 원이 나왔고 어촌계가 쪼개서 우리 집에 떨어진 게 800만 원이었다. 수자원공사는 어업보상만 해줬지 집이나 땅에 대해서는 보상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사는 터전과 생업을 잃는 상황인데 보상이 너무 적었다. 1992년도에 수자원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했고 1994년도에 1심에서 이겼다. 85억5000만 원 판결이 나고 20억 원을 가집행했다. 변호사는 40% 가져갔다. 일단 주민 12억, 변호사 8억을 받고 고등법원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1996년도에 원 판결 금액에서 25억을 패소했다. 나머지 금액을 소송한 124명이 나눠보니 각 5000만 원씩 받아갈 수 있었다. 여기서 2000만 원씩은 변호사에게 줘야 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는 패소했다.
환경운동가가 되다
우리나라의 법은 일본법과 매우 흡사하다. 일본법에서는 관행보상을 인정해 준다. 여기에 준해서 보상을 받은 건데, 1991년 1월부터 우리나라 수산법이 개정됐다고 하더라. 관행어업 보상은 없다고 나왔다. 1992년에 소송해서 1994년까지도 몰랐고, 1996년도에 고등법원 판결이 날 때도 몰랐는데 대법원에 가서 나왔다. 그렇게 져서 받은 5000만 원 중 3750만 원을 물어내라 했다. 그런데 이자까지 붙어서 오천 몇 백만 원을 내야 했다. 거기에 시화호가 썩었다고 난리가 났다. 시화호 현장을 찾아가서 만난 사람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최열이다. 그때 환경에 대한 얘기들을 들었다. 그 당시 안산환경운동연합은 있었는데 화성은 없었다.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서 화성환경운동연합 발기연대준비위원장을 하고, 2005년 오산에서 처음 오산·화성환경운동조합이 창립됐다. 나중에 갈라지긴 했다. 화성호 다 막아가는데 그거 반대하러 다니고, 새만금 가서 또 처절하게 싸우고, 수원 전투 비행장과 관련해서 또 싸웠다.
옛날같이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지금은 화성연안환경문화연대 회장으로 있다. 화성연안환경문화연대는 연안의 쓰레기 문제, 갯벌 살리기, 수질 문제 등에 우리 어민들과 조직이 나서는 거다. 어도나 우음도 당제 등 시에 산재해 있는 여러 가지 문화를 발굴하는 일도 한다. 앞으로는 이곳의 생태계가 복원되고 지역 주민들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우리 7개 어촌계에 계원이 800명 정도 있었는데 이제 400명밖에 안 남았다. 나도 2011년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어 몸이 전과 같지 않아 아쉽다. 시화호가 바다로 다시 살아나서 필요에 따라 한정적으로 나가 수산물 채취하는 걸 관광과 연계시키는 사업 등을 해서 주민들이 모여 옛날같이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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