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8
배이슬 /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교육의 본질인 자립의 시작은 ‘농’으로부터, 농업의 구조적 문제는 ‘교육’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름이 가지는 다양성과 풍요로움이 곧 우리 사회와 삶을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다양한 고민으로 실천하려 애쓰며 살아가는 농민입니다.
기후위기,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배우게 할 것인가
올해 아이들과 심은 배추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망연자실했다.
학교에서 교과처럼 생태 농사를 함께 지은 지 올해로 6년이 되었다. 어느 해에는 가을에 팝콘을 해 먹는다고 신나게 만든, 미로 모양 텃밭에 쥐이빨옥수수가 모두 누워서는 없어졌다. 먹은 태로 봐서는 멧돼지가 먹은 것 같았다. 어느 해부터인가는 학교 텃밭 노지에서 토마토를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날이 더워지면서 잎만 무성했다가 열매가 맺을 때 집중된 비와 강렬한 더위로 터지거나 썩어 없어지는 일이 허다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대책을 마련했다. CCTV를 달아 범인을 잡아야 한다거나 벌레가 죽게 약을 뿌리자고 하기도 하고 커다란 대포를 쏴야 한다는 이야기부터, 속상하니 밭에 아무것도 심지 말자고 푸념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과 텃밭의 공간이 지나온 시간을 상상해보고는 한다. 학교의 텃밭은 학교가 생기기 전에는 어떤 공간이었을까. 학교가 생겨 텃밭이 만들어졌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렇게 적이 아닌 존재로 텃밭에서 관계 맺고 사는 생명을 들여다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배추를 들여다보며 우리는 왜 학교에서 텃밭하는지 되새겨 볼 배움이 기회를 얻는다. 내가 배불리 먹기 위한 것인가? 지구와 함께 먹고사는 일을 만나기 위한 것인가? 텃밭의 주인은 나인가, 오래도록 그 공간에서 삶을 일궈온 다른 생명의 권리는 없는가? 그렇게 어쩌면 허무맹랑할지 모를 동화처럼 아이들과 하나하나 상상하고 이야기 나눈다.
'함께 먹고사는 꼴'을 만나야 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많이 언급되는 환경, 생태, 전환의 교육은 사실 갑자기 발생한 것처럼 느껴지는 환경문제에 급하게 들이밀 교육의 콘텐츠가 아니다. 중요한 건 자립이다. 교육하는 이유는 한 인간으로서 먹고살 수 있게 하는 일, 그로써 나와 연결된 함께 먹고사는 일을 체감하고 경험하는 일이다. 다른 무언가의 생명을 가지고 오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을, 오늘 내가 숨 쉬고 뛰고 이야기하는 힘은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교육은 시작한다.
다르게 보면 교육은 ‘나’를 만나고 만들어가는 일이자 나에게로까지 연결되는 주변의 존재들로부터 어떻게 살아갈지 지혜를 엿듣는 일이다. 그렇게 기존의 경험을 벗어나 다시 관계 맺는 일이다. 감자가 모두 감자가 아니라 논감자, 울릉도홍감자, 고무신감자, 지게감자, 두백감자, 수미감자로 만나는 일로 아이들은 다름이 이상한 게 아니라 각각의 색과 모양, 쓰임으로 모두를 풍요롭게 하는 다양성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배불리 먹거나 실컷 맛보지 못해도 다음을 위해 씨앗을 먼저 받는 것으로 지속가능성을 배운다. 씨앗을 받기 위해 볕에 내놓아 물러진 토마토를 씻고 걸러내어 씨앗이 되자 썩었다고 코를 부여잡던 아이들은 신기해 한다. 한 아이는 확신에 차서 말하기도 했다. ‘이건 토마토 씨앗이 아니에요! 내가 평생 토마토를 먹었는데 토마토는 씨앗이 없었어요!’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연을 흉내 내어 미생물에 의해 썩고 높은 온도에서 씨앗을 통해 전염되는 바이러스가 줄어들게 되는 씨앗이 돌아오는 지혜를 배운다. 다시 씨앗이 되어 그다음 해 똑같은 토마토를 만나게 되는, 온전한 토마토의 한살이와 코딱지만한 씨앗이 다시 커다란 토마토로 자라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고 나면 토마토는 더 이상 마트에 진열되었던 상품이 아니라 생명이 된다. 그렇게 토마토와 다시 관계를 맺는다.
기후위기 시대에 지속가능한 삶, 생태전환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가 만들어 낸 ‘함께 먹고사는 꼴’을 만나야 한다. 그것을 가르치지 않고는, 그 지혜를 연결해 물려주지 않고는 기후위기를 벗어날 희망이 없다. 반짝하는 잘 팔리는 교육콘텐츠가 아닌 삶을 바탕에 두고 일상으로 스며들 생태적 지혜를 가르쳐야 하는 때다.
그대들,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다큐멘터리 <씨앗: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에서 말하길 20세기 한 세기 만에 93%의 씨앗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나의 씨앗을 둘러싼 역사와 문화, 그것과 관계 맺고 살아온 수많은 생명을 생각해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너져 왔을까. 씨앗과 문화와 생명의 그 당연한 그물코의 연결에서, 우리는 인간을 왜 별도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또 다른 다큐멘터리 <대지에 입맞춤을>을 보면 그 무엇보다 확실한 대안은 이미 우리 발밑에 있다고 말한다. 땅속에서 꺼내 써서 공기의 형태로 변한 탄소를 다시 생명을 키우는 지구의 원동력으로, 땅으로 돌려보내야 하고, 그 방법은 이미 오래전 우리가 알던 지혜들이라고 한다.
농업학교에 다닐 때 혼자 의아했던 것들이 있다. 왜 호박이 열매채소로 구분되는지, 농민의 자녀들임에도 쌀값 대란에 대해 농민들에게 배부른 소리한다고 하는데 왜 아무도 화를 안 내는지, 할머니는 손쉽게 만드는 두부를, 왜 교수님은 몇 번이나 실패하는지와 같은 것들이었다.
매년 ‘미쳤네’라며 혀를 내두르고, 그전에 배고파도 먹지도 않던 씨를 구해다 심어 놨냐면서도 꼭 단단히 씨앗을 받아 놓던 할머니는 작년 겨울 돌아가셨다. 10년을 손녀와 농사짓느라 날마다 전쟁처럼 티격태격하던 나의 동지이자 엄마이자 스승이자 친구였던 할머니는 이제 내게 새겨진 것들로만 기억할 수 있다.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 내가 농사짓지 않기를 바라셨지만, 최선을 다해 농사를 가르쳤다.
땅콩을 수확하던 날 할머니가 해 준 이야기를 기억한다. 갑자기 때아닌 서리 소식에 저녁 늦게 땅콩을 터느라 해가 다 진 추운 저녁이었다. 굼벵이가 파먹은 것을 개려 터느라 손은 느리고 날은 추워 입이 나왔는데, 할머니는 말없이 부지런히 갈무리했다. 굼벵이가 다 먹어서 검정땅콩은 씨도 없겠다며 툴툴거렸더니 할머니가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땅콩 하나 심었는데 이렇게 달렸지? 세상 어떤 일도 이렇게 몇 배로 되는 게 없어. 농사만큼 몇 배로 돌려받는 일은 없어. 봐라. 농사만큼 부자 되는 일이 없다. 딱 나 하는 것에 달렸어.’
2013년에 농대를 졸업하고 농사짓기 시작했을 때 배울 만큼 배웠다고 자신했는데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허무했다. 왜 배운 게 소용없나 차근히 들여다봤을 때 그해에 심고 키우고 거둔 것들이 얼마나 되는지 세어 봤다. 100여 가지가 넘었다. 전문적으로라는 이름으로 다 쪼개서 배웠는데 할머니의 농사는 먹고 쓰는 대부분을 길러냈기 때문에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 손에 큰 내게 할머니가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먹고사는 지혜였다. 호박은 잎도 먹고 꽃도 먹고 풋것으로 먹고 익은 것을 먹고 씨앗도 먹으니, 내게는 열매채소로 분류하는 일이 와닿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봄이면 씨 넣고 땅 갈기 바쁠 때 지천으로 널린 나물과 풀을 뜯어먹을 수 있다는 것도, 호기롭게 심었다가 멧돼지가 고구마밭에 한 개도 남기지 않았을 때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도 배웠다.
할머니는 ‘남 미워하면 내가 못나져서 못써, 내가 힘드니 미워하면 안 된다’라며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쳤다. 그렇게 할머니의 지혜를 연결하는 일이 내게는 사명처럼 남았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한다면, 빠질 수 없는 ‘먹고’의 영역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선택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선택했다
할머니에게 배운 것들을 잃지 않고 전달하려고 사람들을 만난다. 볍씨를 담그고 모내기를 하고 벼를 거두어 밥을 짓고, 식혜를 만들고, 막걸리를 담고, 떡을 찌고, 찰밥을 한다. 이른 봄 밭에서는 명아주 뜯어와 한 끼니를 먹고, 밭 가상에 절로 자란 할머니에게서 온 씨앗들로 한해를 먹고 씨앗을 거둔다. 그리고 그 과정을 아이들과 사람들과 함께한다.
모두가 존재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감자에게 배운다. 우리는 쉽게 이해하기 위해 분류하고 나누고 정의한다. 거기서부터 발생하는 오류는 눈감고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들은 불편해 한다.
농사와 삶이 떼려야 뗄 수 없고(농부든 아니든), 일과 삶의 경계가 불분명한 것이 농촌의 삶이라는 것이 내게는 감사한 일이다. 다양한 존재의 형태와 삶을 기존의 잣대로 구분 짓지 않는다. 그래야 어떻게 함께 먹고살 것인가를 나눌 수 있다.
기후위기에 아주 구체적인 해답은, 그렇게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그물코의 한 코로 생명을 키우고 먹고 분해하는 복잡하고도 어려운 형태로서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넘기는 사람도 많지만, 가난하게 보일지언정 농사를 지으면 굶어 죽지 않는다. 풀 뜯어 먹으면 되니까. 나는 기후위기를 그렇게 살기로 했다.
*이든농장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농장입니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습니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며 삶을 짓는 농장입니다. 사람들과 농사지으며 나누는 것을 열심히 해 왔고, 지금은 잠시 쉬어 가는 중입니다.
배이슬 페이스북 (2) Facebook
마녀의 계절(페이스북) (2) Facebook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실천하는 농민단체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