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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파머 | 안정화 종합재미농장 대표 | ‘씨앗 만나는 날’, 잃어버린 토종씨앗들의 이야기를 듣다

 

2024-09-13


편집자 주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조절되지 않은 탄소 배출과 온실가스의 증가로 기후 이상 변화는 우리 삶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먹거리를 자연에서 길렀던 전통적인 산업들은 기후위기로 인해 생산, 유통, 소비에서 전에 없는 변화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어스 파머(Earth Farmer)]는 농업, 축산업, 임업, 어업 등에 이르기까지 재배 방식, 생산과 유통 시스템, 생산자 조직, 소비 패턴, 기술 양상, 식생활 문화, 정책과 교육, 정보와 분석에 새로운 바람이 불러일으키는, 직접 생산자들과 유통업자들, 기술과 시스템 개발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고자 합니다.

 

안정화 종합재미농장 대표. 사진_종합재미농장

안정화 / 종합재미농장 대표, 두물뭍농장 농사안내자


경기 양평군에서 짝꿍과 함께 자연과 함께하는 농사를 배우고 있다. 작은 농사를 지으며 농사와 일상이 하나가 되는 삶을 꿈꾼다. 씨앗에 담긴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 책으로 『우리가 농부로 살 수 있을까』, 『농사가 재미있어서』를 지었다.

 

올해 더위는 유난하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또 폭염 경보가 발령되었다. 밭일을 하면서 땀을 뚝뚝 흘리다가 머리가 어지러워질 때면 얼른 그늘로 가서 물을 마신다. 농사일의 재미에 푹 빠져 삶의 방향을 바꾼지 8년, 올해 이 더위는 유난히 힘들다. 내 몸을 움직여 땅을 가꾸고 작물을 키우는 단순하고 정직한 삶을 꿈꿨는데 현실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기후 재난이다.

농사를 시작하며 직업으로서의 농부나 농업경영인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의 농사가 되기를 꿈꿨다. 어떤 농사를 짓고 싶은지 남편과 둘이 많은 대화를 통해 조금은 자연에 해를 덜 끼치는, 조금 더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의 농사를 짓고 싶다고 결론지었다. 사람의 인위적인 행위를 최소화하며 자연의 조화로움과 그 생명력을 믿고 그것에 기대어 농사를 짓는 삶. 그것은 말과 글로는 아름답지만 우리에게는 많은 경험과 공부가 필요했다.


씨앗 받는 농사를 접하다


농사 첫 해, 큰 수확을 바라지 않고 다양한 것들을 밭에 심어 잘 관찰해 보았다. 읍내에서 사온 모종들이 우리 밭에 적응하기 힘들어한다고 느꼈다. 경험 많은 선배 농부님들은 씨앗을 심고 받아 다시 심으면 식물이 점차 그 땅과 농사방법에 적응한다고 했다. 우리는 시중에 판매하는 대부분의 씨앗과 모종이 그 씨앗을 받아 다시 심었을 때 반드시 같은 작물이 자라지는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씨앗을 심고 거두는 농사에 대해 공부하며 해마다 조금씩 새로운 씨앗을 나눔 받아 농사를 지어 왔다.


1년 동안 심고 거두는 여러 씨앗들. 제철 채소들의 씨앗은 그 자체로 정갈하고 아름답다. 사진_종합재미농장

토종씨앗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함께 살아간다


우리가 심는 씨앗은 대부분 토종씨앗이다. 토종은 원래 한반도가 원산지인 씨앗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농작물은 많지 않다. 콩이 우리나라가 원산이라 하지만 콩 중에도 완두나 동부 같은 것은 다른 대륙에서 들어온 것이고 정말 우리나라에서 비롯한 것은 메주콩 한 종류라고 한다. 그렇다고 메주콩만 한국 토종은 아니다. 처음엔 외국에서 들어왔다고 해도 충분한 시간 동안 이 땅에 살고 적응하여 씨앗을 남기고, 씨앗을 심으면 그 모양 그대로 자라는 식물도 토종의 범주에 들어간다. 나는 씨앗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에 포함되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에 토종이라고 생각한다. 농부가 오랜 기간 씨앗을 심고 거두는 데는 이유가 있을테니 말이다.


씨앗을 직접 채종하고 직접 키워야 하는 토종농사


그렇게 몇 년 토종씨앗을 심다 보니 주변에서도 알게 되어 종종 토종이 생각보다 별로라는 불만을 듣거나, 씨앗을 나눠 달라거나 모종을 키워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도 있다. 토종작물은 모종을 키워 판매하는 곳도 별로 없고, 그런 곳을 찾아도 원하는 만큼, 다양한 종류를 구입하기 어렵다. 판매하는 모종을 사서 심고 먹기 위한 수확이 끝나면 뽑아내는 지금의 흐름과는 달리 토종농사는 모든 과정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배추를 심으려면 한 달 전에 미리 씨앗을 넣어 모종을 키워야 한다. 겨울에 배추를 수확할 때엔 다음 해에 씨앗 받을 배추를 골라 뿌리를 잘 보관해야 하니 긴 호흡으로 계획해야 하는 농사다. 아마도 토종씨앗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지 않는 것은 씨앗을 직접 채종하고 씨앗으로부터 직접 키워야 하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토종작물인 조선오이. 사진_종합재미농장
'씨앗 만나는 날', 오이 씨앗을 채종하고 있다. 사진_종합재미농장

‘씨앗 만나는 날’, 익어가며 달라지는 오이 맛을 보다


지난 주말, 우리 집에서 자그맣게 '씨앗 만나는 날'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번 달에는 오이와 토마토를 주제로, 참가자들과 밭을 둘러보고 오이 채종을 실제로 해보고, 다양한 오이와 토마토를 맛보는 자리였다.

재작년부터 시작된 이 워크숍은 토종씨앗을 키워 온 여러 해의 고민과 경험들이 녹아 있다. 씨앗을 직접 키워 보려는 사람을 위해선 작물을 키우는 방법과 채종시 주의점 등을 나누고 실제로 채종 과정에 참여해 보면 씨앗을 거두는 일이 조금은 가깝게 느껴지지 않을까. 가벼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는 씨앗을 관찰하고 토종작물을 여러 형태로 맛보면 어떨까. 토종작물에 아무리 의미가 있다고 한들 맛있고 마음에 들어야 시장에서 찾을 터이고, 씨앗을 받고 다시 키우고 싶어질 테니 말이다. 농부의 기본은 작물을 키워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것이겠지만 부가적이라 여겨지는 농부의 경험과 씨앗에 담긴 이야기들을 전달하고 싶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키우는 채소들이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생산 과정과 생산자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고, 소비자 또한 채소의 맛과 이야기를 다채롭게 즐길 수 있다.

지난 몇 차례의 워크숍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작물의 씨앗을 거두고 맛을 보았다. 오이마다 향기가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이가 익어가며 달라지는 맛을 느꼈다. 팥을 삶아 샐러드로 만들어놓은 것을 보고 이렇게 먹을 수 있을지 몰랐다고 놀라워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토종작물을 전통의 것으로 여기고 멀리하지 않았으면 해서 최대한 맛있고 간단한 요리를 해서 나눠 먹었는데 그 의도를 정확히 알아줘 기뻤다. 처음 해보는 키질을 어색해했지만 대부분 즐거워하며 검불을 날렸다. 우리가 보관하고 있는 다양한 씨앗을 보여 주며 이야기를 나눴고 씨앗이 너무 예쁘다고 사진을 찍어가는 그 순간들이 기억에 남는다.


팥의 종류가 다양하고 팥마다 맛도 다르다. 사진_종합재미농장

제사상 떡에 올렸던 '흰팥' 이야기 아셔요?


사람들마다 토종에 대해 느끼는 것, 경험한 것이 다 다르지만 토종작물을 맛보고 어렸을 때 먹어본 맛이라 표현하는 것은 이제 나를 비롯한 젊은 세대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씨앗을 이어온 농부님들에게서 씨앗을 나눔 받아 심고 있지만 그 씨앗이 지금 내게 오기까지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씨앗은 가까스로 남았지만 경험은 연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지난주 워크숍 자리에서 다양한 팥을 꺼내어 놓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참가자 한 분이 어머니가 제사상에 올리는 떡을 꼭 흰팥으로 만드셨다고 이야기했다. 귀신을 쫓는다는 팥의 붉은색은 제사상에 올라갈 수 없으니 제사용 떡을 만드는 팥은 따로 정해져 있던 것이다. 요즘엔 집에서 떡을 만드는 일도 드물어지니 제사용 팥의 쓰임도, 팥이 식탁에 오르는 일도 줄어들고 자연스레 팥을 키우는 농부도 줄어든다. 그래서 흰팥의 용도도, 흰팥이라는 게 있었다는 사실도 희미해져 간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잃어가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흰팥, 앵두팥, 노랑팥, 녹두팥 이런 다채로운 씨앗들이 한때 우리 곁에 있었고, 우리가 그것들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커다란 차이다. 나는 이렇게 잊혀진 씨앗의 이야기에 목말라 하다가 사람들과 만나면서 얻게 되는 토종씨앗의 파편들에 감사하다.


흰팥, 노랑팥, 붉은팥, 녹두팥, 재팥 (왼쪽 위에서 시계 방향) 사진_종합재미농장

기억을 나눠준 참가자 옆에 오늘 토종작물을 처음 맛보았다는 참가자도 있었다. 여러 농부들의 손을 거쳐 내게 온 씨앗이 오늘 또 이렇게 새로운 사람에게 이어진다. 덕분에 우리가 농사를 지어 온 시간과 우리가 만나온 농부들을 떠올려보았다. 우리가 만나는 많은 시간들을 정리해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씨앗을 매개로 누군가와 닿게 되는 이 순간이 참 소중하다.



‘씨앗 만나는 날’ 참가자들과 함께 밭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_종합재미농장

서울에서 ‘종합재미상사’라는 이름으로 재미있는 삶을 찾아다니던 두 사람(안정화와 김신범 부부)이 만든 경기도 양평에 있는 농장으로, ‘종합적으로 다양한 재미를 키우는’ 종합재미농장이다. 자급자족을 목표로 식생활에 필요한 여러 작물들을 키우기 시작해 작은 땅에 다양한 씨앗들을 심고 거두고 있다. 종합적으로 다양한 고민을 가지고 자연과 함께 하는 농사를 배우고 시도하는 중이다. 농부시장 마르쉐@에 출점하며, 매달 발송하는 제철채소꾸러미 ‘종합재미꾸러미’를 운영하고 있다. 2022년부터는 ‘씨앗 만나는 날’이라는 이름으로 토종씨앗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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