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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1타 중국 철학자 | 깨달음의 함정

 

2024-10-11 윤지산


윤지산


퇴락한 고가에서 묵 가는 소리와 댓바람을 들으며 성장했다. 선조의 유묵을 통해 중국학을 시작했고, 태동고전연구소에서 깊이를 더했다. 한양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인민대학교 등지에서 공부했다. 『고사성어 인문학 강의』,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한비자 스파이가 되다』 등을 썼고, 『순자 교양 강의』, 『법가 절대 권력의 기술』, 『어린 왕자』 등을 번역했다. 또 『논어』, 『도덕경』, 『중용』을 새 한글로 옮겼다. 바둑에 관심이 많아 〈영남일보〉에 기보 칼럼을 연재했다. 대안 교육 공동체, 꽃피는 학교 등 주로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곳에서 강의했다. 현재 베이징에서 칩거하며 장자와 들뢰즈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무의식을 탐구한다.


 

우주의 밖으로 여행할 수 있는가?


지구가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가장 쉽고 명확하게 알 수 있을까? 간단하다. 지구 밖으로 날아가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된다. 지구를 벗어나지 않고도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지구가 평평하고 끝없을 것 같은’ 직관과 억측에 사로잡히면 논리적 증명은 무용하다. 믿음, 특히 거짓을 믿는 것은 진리를 믿는 것보다 더 고집이 세다. 이 고집을 ‘자아(自我)’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천문학의 발전 덕분에, 지구는 우리 은하 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별이며 안드로메다은하가 250만 광년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주가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도 허블-르메트르 법칙(Hubble–Lemaître law)이 이미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면 우주는 끝이 있는가? 우주는 밖이 있는가? 최근 라그랑주 포인트(Lagrangian Point)에서 우주를 촬영하고 있는 제임스 망원경의 사진에 따르면 우리 우주의 크기가 대략 500억 광년이라고 한다. 빛의 속도로 500억년이지만, 어쨌든 유한한 시간이므로 지금 출발하면 언젠가 도달할 수 있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동력과 수명만 있으면 언제가 그 시간은 온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천신만고 끝에 지금 상정하는 우주의 경계에 도착했지만, 그 극점을 이미 더 멀리 날아가 있다. 제논의 역설에 등장하는 토끼처럼 우리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를 잡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우주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주를 어떻게 보며 이해할 수 있을까?


고행과 분투, 최후


사설이 길었다. 철학은 ‘세계 전체’를 다루는 학문이다. 물론 고대 현인들에게 세계는 현대 우주에서 보는 우주보다 범위가 훨씬 좁다. 안드로메다가 별인 줄 알았으며, 북극성을 붙박이별로 추정했으니,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들은 모두 엉터리인 셈이다. 어쨌든, 세계 안에서 세계 전체를 굽어보려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했던 선각자 덕택에 현 인류가 지적으로 성장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붓다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공자는 주유천하라는 방랑길에서, 소크라테스는 저잣거리에서, 예수는 광야에서, 이 세계 전체를 보고 일성(一聲)을 남긴 것이다. 성현의 깨달음에 각각 차이가 있지만,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주신 것이다. 이를 ‘대오(大悟)’ 혹은 ‘대각(大覺)’이라고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대오는 ‘세계 전체’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얻는 순간이다. 이렇게 ‘우주의 비밀’을 푼 이들의 최후가 씁쓸한 것은 의아하기도 하다. 붓다는 제자가 준 돼지고기 탓에 식중독으로 돌아가셨으며,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달게(?) 마셔야 했고,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공자는 제자 자로(子路)와 장례식 절차를 두고 실랑이를 벌어야 했다. (시작을 열었다는 점에서) 비록 4대 성인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깨달음’의 사례는 무수히 많다. 주희(朱熹)의 ‘두견야오(杜鵑夜悟)’와 ‘기축지오(己丑之悟)’, 육구연(陸九淵)의 ‘심오(心悟)’, 담약수(湛若水)의 ‘연하지오(煙霞之悟)’, 왕양명(王陽明)의 ‘용장오도(龍場悟道)’ 혹은 ‘천천오도(天泉悟道)’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언감생심 그러나


성현, 위대한 학자들께서 깨달은 내용을 공부하고 이해하기는 정말 어렵다. 태생적 천재가 평생을 분투하면서, 어떤 우연과 계기로 한 순간, 세계 안에서 세계 전체를 굽어 본 것을 필자 같은 범인(凡人)이 어찌 닿을 수 있겠는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현들의 치열한 공부 방법은 배울 수 있다. 수징난 선생은 대현(大賢)의 깨달음을 두고 “새로운 공부 방법[新的修行教法]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정의를 다시 한 적이 있다. 또 선대 현인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으니, “(이 길대로) 외로움을 인내하면서, 묵묵히 착실하게,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후학들에게 당부하셨다. 필자는 이 말씀에 감명받았다. 설령 ‘대오의 경계(境界)’에 올라서지 못할지라도, 그것을 향해 분투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하나로 세상을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것


주자(朱子, 여기서 ‘子’는 ‘선생님’이라는 뜻)는 ‘성즉리(性卽理)’를, 왕양명은 ‘심즉리(心卽理)’를 대오했다. 전자를 ‘주자학’ 또는 ‘성리학’이라고 하고, 후자는 ‘양명학’ 혹은 ‘심학’이라고 한다. 이 두 사유가 서양 세력이 밀려올 때까지 동북아 세계의 주류였다는 것은 구태여 토를 달지 않더라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한국은 특히 주자학을, 일본은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이 위대한 가르침도 문제가 전혀 없지는 않다.

조선의 유명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성리학 내부에서 일어난 논쟁이지 성리학 자체에 대한 회의는 아니다. 이 두 사유는 ‘득도에 이르는 과정’과 이후 ‘수행 방법’에서 차이가 크지만, 철학적 구조 측면에서 보면 같은 선상에 있다. 즉 ‘하나로 모든 것, 우주를 설명하려는 야심 찬 기획’이라는 골격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성리학을 절대 신봉하는 측에서 보자면 펄쩍 뛸 발언이다. 그들은 양명학을 이단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런 논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다만 이런 사유에서 내재한 위험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주희에게는 ‘성(性)’, 양명에게는 ‘심(心)’이 곧 ‘하나’인데, 이 하나로 세계를 총괄해 설명하면서 세계에 그 법칙을 강요하는 것은 독재자의 전제 정치와 양상이 비슷하지 않은가? 여기서 살짝 한 발짝 잘못 건너가면 철학이 아니라 신학(神學)이 된다.

한국에 왜 교조적 보수가 많은가? 원흉 이토우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스승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 누구의 책을 읽고 회심했는지 아는가? 오시오 츄사이(大塩中斎, 1793-1837), 그는 사토 잇사이(佐藤一斎, 1772-1859)와 함께 일본 양명학의 쌍벽이었다. 주희와 왕양명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겠지만, 이 두 철학의 어떤 측면에는 이런 오도(誤導)의 함정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양명학에 관심 있는 분께, ‘정인재, 한정길 역 『전습록』(청계, 2007)을 우선 권한다. 성리학과 양명학의 장․단점, 그리고 한국에서 왜 성리학이 융성했고, 일본은 이와 어떻게 다른지 앞으로 계속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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