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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1타 중국 철학자 | 문제적 그러나 치열한, 풍우란

 

2024-10-25


윤지산


퇴락한 고가에서 묵 가는 소리와 댓바람을 들으며 성장했다. 선조의 유묵을 통해 중국학을 시작했고, 태동고전연구소에서 깊이를 더했다. 한양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인민대학교 등지에서 공부했다. 『고사성어 인문학 강의』,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한비자 스파이가 되다』 등을 썼고, 『순자 교양 강의』, 『법가 절대 권력의 기술』, 『어린 왕자』 등을 번역했다. 또 『논어』, 『도덕경』, 『중용』을 새 한글로 옮겼다. 바둑에 관심이 많아 〈영남일보〉에 기보 칼럼을 연재했다. 대안 교육 공동체, 꽃피는 학교 등 주로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곳에서 강의했다. 현재 베이징에서 칩거하며 장자와 들뢰즈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무의식을 탐구한다.


 

전환의 시대


1895년 을미년은 기묘하다.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었고, 단발령이 내리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은 “차라리 머리를 잘라라”라고 포효하며 저무는 시대를 사수하려 안간힘을 썼고, 동학 혁명의 실제 전투를 지휘했던 녹두 장군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 조선의 종주권을 두고 벌인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해이기도 하다. 청나라는 체면을 구기며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적 지위를 잃고 종이호랑이로 전락했으며, 일본은 제국주의의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신구문화가 충돌하고, 동서 진영이 격돌하는 격변기의 서막이 올라가는 시점이다.


혼란의 시대, 인물이 많은 법


이 해에 중국 철학계의 중심이기도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던 풍우란(馮友蘭, 1895~1990) 태어났다. ‘馮友蘭’의 현대 중국 발음은 ‘féngyǒulán’인데, 국내 번역서는 ‘yǒu’를 ‘유’라고 읽었다. 원음은‘요우’에 가깝다. 친구를 뜻하는 ‘朋友(붕우)’를 ‘펑유’라고 읽지 않는다. 중언하지만, 발음 표기는 필자가 상황에 따라 현대 중국음 발음과 우리 발음을 혼용한다. 풍우란이 태어나기 네 해 전에 우리에게 호적(胡適, 1891~1962)이라는 우리식 발음이 더 익숙한 후스가 태어났고, 두 해 전 최후의 유자라고 칭송받는 양수밍(梁漱溟, 1893~1988)이, 현 중국을 개창한 마오쩌뚱(⽑泽东, 1893~1976)이 세상에 나왔다. 이 해에 또 훗날 첫사랑 린휘인(林徽因, 1904~1955)을 잊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북경대 철학과에서 제자를 많이 길렀던 진위에린(⾦岳霖, 1895~1984)도 첫 울음보 터뜨렸다. (蔡仲德, 『冯友兰先生年谱』, 河南人民出版社, 1994 참고). 민국여신(民國女神) 린휘인이라는 이름을 잘 기억해 두자. 이 여인의 연애사와 삶은 중국 근대사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준다. 남편 량스청(梁思成, 1901~1972)은 몰라도 시아버지가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라면 잘 아실 것이다. 량치차오는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부부는 건축학자로서 중국 현대 건설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다. 천안문 광장에 가면 볼 수 있는 인민영웅기념탑(人民英雄纪念碑)도 이들의 작품이다. 량치차오를 다룰 때 자세히 다루겠다.


시대의 굴곡과 함께


중국 현대사의 굴곡이 풍우란 삶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아버지 펑타이이(冯台异)는 국가공무원 최후 시험인 전시(殿試)를 통과한 진사(進士)였고, 자신은 베이징대학교, 콜럼비아대학교 등지에서 공부했고, 칭화(靑华)대학교, 시난(西南)연합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칭화대학교 철학과는 나중에 학제 조정 때 베이징대학교로 옮겨간다. 『인생철학(人生哲学)』(1926)을 필두로 최후까지 원고를 다듬었던 『중국철학사 신편』(2001)까지 학자로서 굵직한 저서도 남겼다. 학생, 선생, 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 영예는 다 누린 셈이다. 그러나 청나라 말 혼란기와 신해혁명(1911), 민국(民國) 시기, 중일전쟁,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문화대혁명, 개혁과 개방, 마오쩌둥과 덩시아오핑(邓小平, 1904~1997), 장쩌민(江泽民, 1926~ 2022) 시대를 걸쳐 살았다. 진시황, 항우와 유방, 유방의 천하 통일, 강력한 군주 한무제(漢武帝)를 겪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어쩌면 그 시대보다 더 신산(辛酸)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황제의 얼굴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체제 자체가 표변하기 때문이다.


지식인과 굴욕


지식인에게 가장 굴욕적인 사건은 무엇일까? 용비어천가를 써야만 할 때, 아니면 자기가 애써 일군 학설을 전부 부정해야만 할 때일까? 1949년 10월 1일, 아직 장제스가 대륙 남쪽에서 여전히 건재한데도 마오쩌둥은 천안문 단상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만천하에 선포한다. 영리하고 대담한 마오쩌둥은 일부러 자금성 앞 천안문에서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당시 공군력은 장제스의 국민당이 우세했지만, 문화재를 아끼는 장제스가 자금성을 폭격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풍우란은 이날 행사에 참가해, 후난(湖南) 사투리가 섞인 마오쩌둥의 일성을 듣는다. 며칠 뒤인 10월 5일, 풍우란은 자진해서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낸다.


“저는 지난 시절 봉건 철학을 강의하였는데 국민당을 도운 꼴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과거의 잘못을 고치기로 결심했습니다. (……) 향후 5년 안에 정협(政協)의 강령대로 과학․역사적 관점에서 20년 전에 썼던 『중국철학사』를 고쳐 쓰겠습니다. 귀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같은 학자들이 현재 중국뿐만 아니라 과거의 중국도 알았어야 했습니다.”


『중국철학사 신편』


시대의 변화를 감지한 풍우란은 어쩌면 진시황, 영락제보다 더 강력한 마오쩌둥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것이다. 이때 풍우란은 54세로, 학자로서 최전성기를 맞이한 때였다. 천재 소년 왕필(王弼)을 제외하고 철학사를 숙련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학자의 반열에 드는 예는 없다. 전 시대를 조망하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 자신의 세계를 펼치는 것이 철학자가 보통 걷는 길이다. 『시경(詩經)』에서 시작해, 존 듀이의(John Dewey, 1859~1952) 프래그머티즘(pragmatism)를 거쳐 『중국철학사』에 이르렀고, 이를 바탕으로 독창적 철학을 완성할 시점이었다. ‘철학사’는 문자 그대로, ‘철학의 역사’이므로 이를 편집하는 이 혹은 해석하는 이의 시각과 관점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 관점이 곧 그 철학자에게는 철학이 되는 셈이다. 철학자에게 철학은 전부이다. 전력을 다해 세운 자기 체계를 스스로 허문다는 것. 이보다 더 혹독한 자아비판이 어디에 있겠는가? 풍우란은 『중국철학사』에 마르크스적 유물사관을 도입하겠다고 스스로 천명한 것이다. 『중국철학사 신편』은 이렇게 탄생한다. 마지막 7권은 사후에 출판되므로, 풍우란 자신은 전질을 다 보지도 못했다. 풍우란의 『중국철학사』는 우리에게 친숙한 책이기도 하다. “펑유란의 중국 철학사는 어려운 시절 나에게 등대와 같은 존재였다”라고 대통령이었던 박근혜 씨가 중국 국빈 방문을 앞뒤고 한 말로 유명해졌다.


박성규 선생이 번역한 『중국철학사』(까치)로 풍우란을 만날 수 있다. 참고로 이 책은 1947년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출판한 『中國哲學史』가 저본이다. 박성규 선생 역시 일전에 소개한 청명 선생의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수학했다. 지면은 짧지만, 앞으로 풍우란이 살아야 했던 시대와 그의 철학을 심도 있게 조명해 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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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개

3 commentai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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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ité
4일 전
Noté 5 étoiles sur 5.

동양철학은 중국이지. 종교철학은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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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ité
31 oct.

철학은 철학사 공부가 전제가 되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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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ité
01 nov.
En réponse à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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