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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1타 중국 철학자 | 봄 누에는 죽고서야 실을 토하지 않고(春蠶到死絲方盡)

 

중국의 철학자 '풍우란'은 시경을 암송하며 자랐기에, 그의 철학서에 문학을 녹여 문장의 품격을 높였다


2024-11-07 윤지산

윤지산


퇴락한 고가에서 묵 가는 소리와 댓바람을 들으며 성장했다. 선조의 유묵을 통해 중국학을 시작했고, 태동고전연구소에서 깊이를 더했다. 한양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인민대학교 등지에서 공부했다. 『고사성어 인문학 강의』,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한비자 스파이가 되다』 등을 썼고, 『순자 교양 강의』, 『법가 절대 권력의 기술』, 『어린 왕자』 등을 번역했다. 또 『논어』, 『도덕경』, 『중용』을 새 한글로 옮겼다. 바둑에 관심이 많아 〈영남일보〉에 기보 칼럼을 연재했다. 대안 교육 공동체, 꽃피는 학교 등 주로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곳에서 강의했다. 현재 베이징에서 칩거하며 장자와 들뢰즈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무의식을 탐구한다.

 

당시(唐詩) 한 수 감상하자.


相見時難別亦難(상견시난별역난)

東風無力百花殘(동풍무력백화잔)

春蠶到死絲方盡(춘잠도사사방진)

蠟炬成灰淚始幹(랍거성회루시간)


만나기도 힘든데 이별은 더 힘드네.

분분한 낙화, 동풍인들 어쩌겠는가.

봄 누에는 죽고서야 실을 토하지 않고

초는 재가되어야 눈물이 마르네


서정성 측면에서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받는 이상은(李商隐)의 시이다. 3, 4연이 압권이다. ‘絲(sī, 사)’는 ‘思(sī, 사)’와 같은데, 여기서는 ‘누에 실’은 곧 ‘생각’을 뜻한다. 이런 수법을 해음(諧音)이라고 한다.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가 많은 중국어의 특성을 살린 수법이다. 곧 ‘삶을 다해야 우리 번뇌도 멈춘다’를 누에에 빗대었다. 풍우란 선생은 고난의 시기에 자주 이 시를 읊조렸다고 한다. 말년에 먹지도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고, 급기야 심장에 이상에 생겨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그때 막내 따님인 종푸(钟璞)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얘야. 이번에 나를 꼭 살려내다오. 아직 책을 마치지 못했어. 책이 완성되면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지금은 아니야.”(『나의 아버지, 펑유란(글항아리)』)


책은 『중국철학사 신편』을 말한다. 이때 구순이 지난 나이였다. 1947년 『중국철학사』 초판이 나온 지 이미 45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학자가 최후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숙연한 광경이다. ‘자아비판’, ‘공자 비판’, ‘추상계승법 비판’ 같은 학자로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칼날 속에서도 꿋꿋했다. 이상은의 시를 가슴에 품고 묵묵히 견뎌 내고 중국철학사에 길이 남을 역작을 후세에 전한다. 사담이지만, 이 장면은 필자를 더욱 분발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성이 짙은 글


풍우란 글은 문학성이 짙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현대 철학 특히 서구 철학의 세례를 받은 이들의 글은 논리적 전개를 중시하는 학문의 특성 탓에 딱딱하기 그지없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같은 책 몇 페이지만 펼쳐 보아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문학은 의미의 다양성,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2~1981)의 표현을 인용하면 ‘의미화의 대체(substitution of signifante)’를 추구하므로 ‘존재와 사유의 일치’를 지향하는 철학과 양립할 수 없다. 『도덕경』 첫머리에서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는 선언은 중국 철학의 한 특성을 잘 보여 준다. “기표와 기의는 일대일 대응하지 않고, 기표 아래에서 기의는 영원히 미끄러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은 ‘철학보다 문학이 우세’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왠지 꼰대 같은 할아버지 이미지가 강한 철학자보다 사마천(司馬遷),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소동파(蘇東坡)가 더 유명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국인의 마음에는 늘 문학의 씨앗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강의 쾌거는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시경(詩經)』과 가학(家學)


풍우란은 철학서 안에 문학을 녹여 냄으로써, 문장의 품격을 한껏 높인다. 한‧중‧일 철학자 모두 배워야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이 점점 인민과 멀어져 가는 이유를 꼽으라면, 글에 향기도 재미도 없는 탓이리라. 선생의 문체와 가학은 무관하지 않다. 1895년생이니, 이때만 하더라도 공부의 시작은 중국 고전이다. 부친은 진사 출신 관료라서 매우 바빴고, 아들 교육은 모친인 오청지(吳清芝)가 맡았다. 오청지는 『백가성(百家姓)』, 『삼자경(三字經)』 같은 기초 교재가 아니라 『시경』부터 읽게 했다. 중국인의 교육 방법에는 특출한 비법 같은 것이 없다. 어쩌면 공부의 여정에 어떤 “왕도(王道)”도 없지 않을까? ‘암송할 때까지 반복해서 읽는 것’ 그뿐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도 『맹자(孟子)』를 3백번 읽으니 어느 순간 ‘툭’하는 문리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주입식 교육의 폐해 탓에 암송이 마치 죄악시도 되지만, 그것보다 빨리 습득하는 길은 없다. 이 덕분 자택에 책이 몇 권 없었다고 한다. 머리에 다 들었는데, 자리만 차지하는 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앞으로 소개할 모종삼(牟宗三, 1909-1995) 선생도 이 과에 속한다.


공자와 첫 만남


풍우란에게 『시경』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경』은 가사 모음집인데, 현대 가사처럼 어휘가 다양하고 의미가 넓으며, 은유 같은 여러 기법이 등장한다. 단조로운 기초 한문 어학 교재에 없는 것을 『시경』은 담고 있다. 현존 『시경』은 또 공자가 정리했다는 설이 정설로 통한다. 이를 ‘산시(刪詩)’라고 한다. 공자가 당시에 유행하던 노랫말을 모아 정리하면서 뺄 건 빼면서 300수(首)로 편집한 것이다. 이 대목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책을 편집할 때, 나아가 역사를 기록할 때, 반드시 편집자의 의도와 의식에 들어가기 마련이다. 공자가 성인일지라도 이 함정은 피할 수 없다. 역으로 말하면, 공자는 이 덕분에 성인에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산시’의 과정을 ‘좋은 것을 가려 뽑았다’라고 호평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제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을 삭제했다’라고 악평할 수도 있다. 어쨌든 풍우란의 풍부한 감수성에는 공자의 사유도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문혁 당시 구호 중 ‘비림비공(非林非孔)’이라는 구호를 기억하시리라. 항일 전쟁의 명장 린뱌오(林彪)와 공자를 동시에 격하하고 타도하겠다는 뜻이다. 홍위병에 등쌀에 못 이겨, 아니 목숨이 풍전등화라 풍우란 역시 여기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린뱌오와 공자를 동격에 놓은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 사유의 모태를 정면으로 부정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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