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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1타 중국 철학자 | 세상사 결국 인연이 만드는 것

 

중국의 철학자 '풍우란'이 북경대 철학과에 입학 당시, 스승과의 인연과 결혼을 둘러싼 세태를 말하다


2024-11-21 윤지산

윤지산


퇴락한 고가에서 묵 가는 소리와 댓바람을 들으며 성장했다. 선조의 유묵을 통해 중국학을 시작했고, 태동고전연구소에서 깊이를 더했다. 한양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인민대학교 등지에서 공부했다. 『고사성어 인문학 강의』,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한비자 스파이가 되다』 등을 썼고, 『순자 교양 강의』, 『법가 절대 권력의 기술』, 『어린 왕자』 등을 번역했다. 또 『논어』, 『도덕경』, 『중용』을 새 한글로 옮겼다. 바둑에 관심이 많아 〈영남일보〉에 기보 칼럼을 연재했다. 대안 교육 공동체, 꽃피는 학교 등 주로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곳에서 강의했다. 현재 베이징에서 칩거하며 장자와 들뢰즈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무의식을 탐구한다.

 

북경대 철학과 입학


夜過黃河風怒號 야과황하풍노호

煙波暗淡月輪高 연파암담월륜고

挾沙走石來千里 협사주석래천리

橫絕中流是此橋 횡절중류시차교


황하를 지나는 밤바람이 요란하네

물결 일고 안개가 자욱한 밤 둥근 달이 높이 떴구나

돌을 딛고 모래를 품은 채 천 리를 흘러 왔는데

이 다리를 만나 허리가 잘리고 마는구나!


1919년 유학 직전, 풍우란은 마치 미래를 예상한 듯 이 시를 짓는다. 1912년 상해 제이(第二) 중학에서, 영어 독본 『논리학강요(論理學綱要)』을 읽고 철학을 평생 업으로 삼겠다고 다짐한 지 8년 만이다. 당시 이 학교에서는 영어 교재만 썼는데, 풍우란은 영어보다 철학에 관심이 더 갔다. 당시 중국은 막 “논리학”이 들어오던 때, 이에 정통한 선생은 없었다. 모어(母語)를 마치 외국어 공부하듯 습관이 몸에 배 있어, 영어는 문제 없었지만, 철학은 깊이 알고 싶었다. 중학을 졸업한 1915년 가을 북경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다.


북경대 총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채원배)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늘 인재 양성만큼은 진심인 것 같다. 세상일이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진(秦)나라는 국적과 신분을 묻지 않고 인재를 초청하고 능력에 따라 등용해 천하를 일통(一統)했고, 제(齊)나라 역시 직하(稷下)에 학교를 세우고 학자들 양성했다. 순자(荀子), 맹자(孟子) 같은 후대 중국철학사를 수놓을 무수한 인재들이 여기 출신이다. 이들이 소위 제자학(諸子學)의 토대를 닦았고, 이 기반 위에서 중국 철학은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물극필반(物極必反). 흥겨운 잔치도 언제나 끝이 있고, 만개한 꽃도 시들기 마련이다. 사상이나 철학도 이 숙명 같은 섭리를 피할 수 없다. 기존 체제나 이념이 흔들릴 때, 지식인은 대개 세 가지 양상을 띤다. 보수파, 절충파, 개혁파. 물론 그 내부에서 갈래가 수만 가지이다. 차이위안페이(1868~1940)는 국가공무원 최종 시험을 24살에 통과하고 관료 생활을 한다. 이후 청일 전쟁, 무술(戊戌) 정변을 겪으며 일신한다. 전족(纏足) 폐지, 과부 재가 허용, 합의 이혼, 여성 학교 설립 등 여성의 인권과 교육에 투신한다. 공자 혹은 주희(朱熹)의 학문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여성을 남성의 결여로 보는 한 반쪽짜리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위안페이는 북경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재 초빙에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학력, 인맥, 출신을 지워 버리고 오직 실력만으로 교수를 뽑는다.

중졸 출신 량수밍(梁漱溟, 양수명)을 기존 교수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발탁한 것도 그였다. 량수밍(1893~1988)이 『동방잡지(東方雜志)』에 발표한 〈구원결의론(究元決疑論)〉을 보고 그릇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컬럼비아(Columbia)대학교에서 존 듀이의 지도를 받았던 후스(胡適, 1891~1962)도 이때 교수로 부임한다. 뿐만 아니라, 후에 신문화 운동을 주도하는 천두슈(陳獨秀, 진독수), 대문호 루쉰(魯迅, 노신) 등도 모셔 온다. 특히 눈길을 끄는 이가 양창지(楊昌濟, 양창제)이다. 양창지의 섯째 딸이 양카후이(楊開慧, 양개혜)이고, 훗날 마오쩌둥과 결혼한다. 마오쩌둥을 북경대학교 도서관 사서로 불렀던 이도 양창지이다. 과장하자면, 신중국은 차이위안페이의 안목과 손길에서 탄생하는 셈이다.


스승이라는 인연


훗날, 이 인연은 얽히고설켜 동지가 되기도 원수가 되기도 한다. 인간사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차이위안페이 덕분에 풍우란은 신문화의 세례를 듬뿍 받았다. 학자로서 이보다 큰 복은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 어두운 밤길에 등불을 만나는 것과 같다. 공부의 길은 참으로 망망대해이다.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때 스승은 나침반, 지도 같은 역할을 한다. 물론 배움에 목마른 이에게만 이 행운은 찾아온다.


결혼과 도미(渡美)


신중국 성립 전후로 명성이 꽤 자자한 인물 중, 결혼을 한 번밖에 안 한 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마치 자유연애를 위해 혁명을 주도했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그래서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저우언라이(周恩來, 주은래)와 후스 정도밖에 없다. 덩잉차오(鄧潁超, 등영초)는 저우언라이와 혁명 동지로 난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문을 당해 불임(不任)인 채로 신중국 건설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둘은 해로한다. 미국 유학을 거치고 백화(白話)운동을 주도하는 등 자유연애를 신봉할 것 같은 후스도 전족한 여인 지앙동슈(江冬秀, 강동수)와 평생을 함께한다. 소문에 따르면, 지앙동슈가 워낙 강성이라 후스가 무서워서 이혼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지앙동슈는 문맹이었다.

풍우란도 어린 나이이 부모가 정해 준 인연으로 성혼을 했지만, 부부 사이의 정이 없었고 게다가 아내가 일찍 병사했다. 관례대로라면 재혼도 부모가 정해 준 짝과 해야 한다. 당시 불문율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의 명을 거역하기 쉽겠는가? 풍우란은 상해 중학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런짜이쿤(任載坤, 임재곤)과 유학 직전 혼례를 서두른다. 런짜이쿤은 북경여자사범대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므로 졸업하기까지 기다린 것이다. “재학 중 결혼 금지” 같은 법은 지금 시각에서 악법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인재 유출을 막으려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을 것이다. 스무 살도 채 안 되어 혼례를 치르던 시기가 아닌가? 런짜이쿤의 부친은 런즈밍(任芝銘, 임지명)으로 그 역시 무창기의(武昌起義)를 주도했던 개혁파에 속한다. 혁명 이후 교육계에 투신하면서 여성 해방과 교육을 강조한다. 당시 북경여자사범대학교는 북경대학교와 쌍벽을 이루던 명문으로, 풍우란은 평생 학문적 동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말년에 풍우란은 “중년의 업적은 모두 현처 덕분(中年事業有賢妻)”라는 감사의 말을 잊지 않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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