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6 윤지산
윤지산
퇴락한 고가에서 묵 가는 소리와 댓바람을 들으며 성장했다. 선조의 유묵을 통해 중국학을 시작했고, 태동고전연구소에서 깊이를 더했다. 한양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인민대학교 등지에서 공부했다. 『고사성어 인문학 강의』,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한비자 스파이가 되다』 등을 썼고, 『순자 교양 강의』, 『법가 절대 권력의 기술』, 『어린 왕자』 등을 번역했다. 또 『논어』, 『도덕경』, 『중용』을 새 한글로 옮겼다. 바둑에 관심이 많아 〈영남일보〉에 기보 칼럼을 연재했다. 대안 교육 공동체, 꽃피는 학교 등 주로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곳에서 강의했다. 현재 베이징에서 칩거하며 장자와 들뢰즈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무의식을 탐구한다.
허물을 고치지 않는 것이 곧 허물(過而不改, 是謂過矣)
첫 글이 나가고 몇 분이 바로 오류를 지적해 주셨다. 우선 ‘필로로기(philology)’의 어원은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Theaetetus)』인데, 여기서는 ‘논증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나아가 근대 독일철학자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가 “시공간에서 인간 정신의 모든 현시(顯示)에 대한 연구”라고 했는데 이 정의를 사용하는 것이 어떤가 제안해 주셨다. 또, 필자는 ‘陈寅恪’를 ‘천인커’라고 읽었는데, ‘恪̀’은 정식 표기는 ‘커(ke)’이지만, 본인이 ‘췌(que)’라고 읽어달라고 해서 ‘천인췌’가 정확하다고 가르쳐 주신 분도 있었다. 고려대에서 ‘혜강 최한기’로 연구하는 중국인 후배 천디팡(陈迪芳)은 글쓴이가 박사 취득 연령을 과장한 측면이 있다며, 30대 중․후반이 적당하다고 했다. 동문인 김정기 선생은 『양명평전』을 번역한 김태완 선생이 『임원경제지』 번역에도 많이 도와주셨다고 전해 왔다. 익명으로 과실을 지적해 주시고 정보를 주신 선․후배께 감사드린다. 허물을 바로 잡는다.
한국의 학맥, 태동고전연구소
이 과정에서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도 학맥으로 얽혀 있다는 것을 재차 발견한다. 다름 아니라 ‘태동고전연구소(泰東古典硏究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진인각, 최후의 20년』을 번역한 박한제 선생, 천디팡의 지도교수인 김형찬 선생, 현대 한국 번역사에 획은 그은 『임원경제지』 번역의 책임을 맡은 정명현 소장, 『본리지』를 번역한 김정기 선생 모두 태동고전연구소 출신으로 청명(靑冥) 임창순(任昌淳, 1914~1999) 선생의 제자이다. 이후 한국 학맥을 소개할 때 자세히 거론하겠다.
선진제가에서 송학으로
어원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만 더 짚고 넘어가겠다. ‘지축을 흔들 만큼 변혁의 기점 혹은 계기’를 ‘쿠페르니쿠스적 전회/혁명(Copernican Revolution)’라고 표현한다. 주지하다시피 ‘revolution’은 그냥 ‘회전’이라는 뜻인데, ‘지동설’이 그만큼 ‘혁명적’이라서 여기서 ‘혁명’의 의미가 파생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지금 우리가 쓰는 의미인 ‘혁명’으로 본격적으로 사용한다. 표현이 같더라도 의미는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달라진다. 수징난 선생에게도 이런 ‘전회’는 찾아온다. 물론 이런 표변(豹變)은 단박에 찾아오지 않는다. 오랜 숙성을 거쳐야 열매가 열린다.
선생에게서 전회란 ‘선진(先秦)’에서 ‘송학(宋學)’으로 연구 방향을 바꾼 사건을 말한다. 1963년 선생은 남경을 여행하다, 공자 사당에서 『양명전서(陽明全書)』 당시 돈 1원 50전(한국 단위로 300원가량)에 구입한 것이 송학과 첫 인연이었다. 1968년 학부 졸업 후 하방 시절에 친구가 『사서집주(四書集注)』를 보내 주었는데, 이후 중학교 교사로 있는 10년 동안 가슴에 이 두 책을 품고 살았다. 설령 중국인일지라도 연구 대상과 시기를 일시에 바꾸기는 절대 쉽지 않다. 앞서 지적했듯, 같은 ‘글자’라도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며, 시대마다 관심사가 판이하므로 상당한 모험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절차탁마
선생은 이 10년 동안 문헌을 깊이 읽으며 대작을 위한 담금질을 거듭한다. 절차탁마(切磋琢磨)! 1981년 소주(蘇州)대학교 중문과에서 교편을 잡으며 본격적으로 주희(朱熹) 연구에 돌입한다. 자택에서 도서관까지 왕복 4시간을 매일 걸어 다니면서 도서관 소장 선장본(線裝本)을 모두 훑었다. 훗날 도서관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선생의 손때가 묻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선장본(線裝本)을 현재 책과 같은 상태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현대식 표점이 없는 백문(白文)이고, 또 오자와 탈자 등도 많아 책이 완전한 상태가 아니므로 독해가 아주 까다롭다.
독서와 집필은 성격이 매우 다르다. 독서가 외부에서 내부로 수렴이라면, 집필은 내부에서 외부로 발산이다. 좋은 책을 쓰려면 다독(多讀)이 필요하겠지만, 능사는 아니다. 자료를 쌓아두기만 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더미에 지나지 않는다. 자료를 정리하고 분류하는 작업이 따라와야 한다. 그래서 좋은 작가란 ‘수렴과 발산’을 동시에 진행하는 신비한 능력을 갖춘 이들이다. 마치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쓰는 듯한 것. 선생은 도서관에서 읽고 귀가 후 매일 썼다. 그것도 붓글씨로. 그의 서예는 속기(俗氣)가 없고 정갈하며 힘이 있는 전형적 학자의 서체이다.
세 가지 원칙
집필 내내 수징난은 스승인 장톈추의 충고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잊지 않았다. “문헌과 자료를 착실하게 읽고, 학문을 진심으로 대하라. 증거를 찾지 않으면 어떤 주장도 하지 마라!” 이 말씀대로, 집필의 큰 줄기를 세운다. 첫째, 시와 산문 등 사라진 자료를 찾아 그에 대한 '집고(辑考)'를 쓰는 것, 둘째, 생애와 이력을 고증하고 확증하여 '연보장편(年谱长编)'을 편찬하는 것, 셋째, 사상 연구하여 '사상대전(思想大传)'을 쓰는 것. 이 원칙을 전회 이후 무릇 50년 대장정 동안 어기지 않고 지켜가며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교학(敎學)을 향한 이 치열한 정신과 자세, 후학이 반드시 배워야 한다. 불교에 대해서, 간혹 선사(禪師)의 날카롭고 위트 넘치는 어록을 먼저 떠올리기도 하는데, 만약 『팔만대장경』 같은 교학이 없으면 선사의 말씀도 공중으로 흩어진다. 이 대목에서 공자의 전언이 깊이 울린다. “생각 없는 배움은 맹목이고, 배움 없는 생각은 공허하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필자는 『논어』 이 구절을 여타 책과 달리 번역했다. 졸역 『논어(지식여행사)』를 참고해 달라. 큰 깨달음 즉 ‘대오(大悟)’는 이 치열한 교학 끝에 불시에 찾아온다. “연비어락(鳶飛魚躍).” “새매가 획 날아오르고, 잉어가 탁 튀어 오른 그 순간”, 그 절정의 대오가 찾아온다.
다음 편에서 소위 ‘용장대오(龍場大悟)’와 ‘양명학의 일면’을 간략하게 서술하겠다. 관심 있으신 분께 우선 정인재 선생이 쓴 『양명학의 정신(새창출판사)』을 추천한다. 정인재 선생은 대만 학맥과 관계가 매우 깊다. 이 부분에 대해서 차차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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