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5대 유학자(북송오자)의 철학적 영향과 주희, 육구연 등의 논쟁을 통해 성리학과 양명학의 논쟁을 간단히 살핀다. 이 논쟁은 현대 신유학 철학자들의 연원과 이해에 중요한 역사적 맥락이다.
2025-02-21 윤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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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산
퇴락한 고가에서 묵 가는 소리와 대나무 바람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선조의 유묵을 통해 중국학을 시작했고, 태동고전연구소에서 깊이를 더했다. 한양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인민대학(人民大學) 등지에서 공부했다. 『고사성어 인문학 강의』,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한비자 스파이가 되다』 등을 썼고, 『순자 교양 강의』, 『법가 절대 권력의 기술』, 『어린 왕자』 등을 번역했다. 또 『논어』, 『도덕경』, 『중용』을 새 한글로 옮겼다. 바둑에 관심이 많아 〈영남일보〉에 기보 칼럼을 연재했다. 대안 교육 공동체, 꽃피는 학교 등 주로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곳에서 강의했다. 현재 베이징에서 칩거하며 장자와 들뢰즈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무의식을 탐구한다.
철학은 논쟁을 먹고 자란다
철학과 종교의 경계는 희미하고 아슬아슬하다. 철학 안에 신학적 요소가 있으며, 신학도 철학적 성분을 품고 있다. 불학(佛學)이 불교가 되기도 하며,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던 서구 중세 신학이 오히려 자기 토대를 허물고 새로운 철학을 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철학과 종교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마도 ‘믿음’을 회의하는 열린 자세가 아닐까! 비판을 성장의 양분을 삼는 것, 타인의 학설과 주장을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이런 측면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사이에 있었던 사단칠정(四端七情)은 모범 사례이다. 맹자의 “향당막여치(鄕黨莫如齒, 마을에서 나이가 제일 중요하다라는 뜻)”라는 전언이 무색할 정도로는 두 사람은 치열하게 논쟁을 주고받는다. 그러면서 자기 학설의 약점을 보수(補修)한다. 퇴계에게도 고봉에게도 모두 축복이었을 것이다. 이후 조선에서 철학은 더 깊어진다. 물론 여기에도 단점은 있다. 두 학자 모두 ‘사단(四端)’ 자체에 대해서 회의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리학자인 그들의 한계일 것이다. 철학은 그 근본마저 의심했을 때 성립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조적 종교’로 쉽게 넘어간다. 성리학자가 자기 철학을 끊임없이 보수(補修)하면서 걸핏하면 보수적(保守的) 색채를 띠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북송오자(北宋五子)
우리가 흔히 ‘성리학(性理學)’이라고 부르는 이 철학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 많다. 중국에서 보통 ‘리학(理學)’이라고 하며, 또 ‘정주학(程朱學)’,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리학’은 ‘심학(心學)’과 대비할 때 쓰는 명칭이고, 정주학은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 형제, 주희(朱熹, 1130~1200)의 성(性)을 딴 것이며, 주자학은 주희를 특히 존숭해서 명명한 것이다. 주희의 위상과 대등한 서양 철학자를 찾으면 우선 칸트가 떠 오른다. 세류(細流)를 받아들였다 흘려보내는 호수 같은 역할을 했던 이들이다. 주희와 칸트는 선대 철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새로운 철학적 체계를 세웠다는 측면에서 철학사에 길이 남을 이정표 같은 학자이다. 그만큼 후대 철학에 영향을 많이 끼쳤으며 또한 그만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주희에게 특히 영향을 끼쳤던 선대 학자들 꼽으라면 북송의 다섯 선생님 즉 북송오자(北宋五子)를 들 수 있겠다. 주돈이(周敦頤, 1017~1072), 소옹(邵雍, 1011~1077), 장재(張載, 1020~1077),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를 두고 후대 학자들이 그들의 업적을 기리면서 북송오자라고 높여서 불렀다. 이 중에서 주희는 특히 정이를 존경했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주희는 정이천(程伊川, 이천은 정이의 호)은 철학뿐만 아니라 문체도 닮았다. 두 학자 모두 간결한 필치로 핵심을 정확하게 짚으면서 주장을 명료하게 표현한다. 주희의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 같은 글은 철학자가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보여준다.
성리학이 핵심을 알고 싶다면, 다른 2차 문헌보다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권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서삼경’이라는 말도 주희에서 시작한다. 주희 이전의 ‘사서(四書)’라는 말도 없었다. 사서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을 말한다. 주희는 사서를 정립하면서 고래(古來)의 유학을 재정립한다. 이를 신유학(新儒學)이라고 부른다. 앞으로 차츰 다루겠지만, 주희가 유학을 새롭게 해석했던 것에는 여러 이유와 목적이 있다. 위진(魏晉) 현학(玄學)과 수당(隋唐) 불교에 대한 응전이 필요했다.
1126년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은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정복당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송나라는 북송과 남송으로 나뉜다. ‘중화(中華)’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주희는 오랑캐에 당한 치욕을 설분(雪憤)해야만 했다. 성리학의 성립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므로 우선 여기까지만 다루겠다. 모우쫑산을 비롯한 신유가(新儒家)를 이해하려면 꼭 필요한 일부만 다루었다. 나아가 다음 이벤트도 알아두어야 한다.
아호지회(鵝浩之會)
정주학(程朱學)을 본격 연구하게 앞서 입문하기에 좋은 책이 하나 있다. 『근사록(近思錄)』이 그것인데, 주희와 그의 동학인 여조겸(吕祖谦, 1137~1181)이 초심자를 위한 특별히 편찬한 책이다. 1175년, 여조겸은 주희를 위해 특별한 만남을 주선하는데, 육구령(陆九龄, 1132~1180), 육구연(陆九渊, 1139~1193) 형제를 아호사(鵝浩寺)로 초청한 것이다.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는 주희와 “심즉리(心卽理)”를 내세우는 형제 사이에서 여조겸은 어떤 합일점을 도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리학’과 ‘심학’은 얼핏 보면 구조가 비슷하지만, 한편으로 절대 화해할 수 없는 상극 같은 측면도 있다. 물론 이들이 자신의 학문 체계를 ‘리학’ 혹은 ‘심학’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대 학자들의 분류상의 편의일 뿐이다. ‘심학’은 육씨 형제에서 발원해 나중에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 1472~1529)에서 꽃을 피운다. 그래서 이 철학을 두고, “육왕학(陸王學)” 혹은 “양명학(陽明學)”이라고 부른다. 앞서 성리학을 두고 명명하는 방법과 같다.
무림 지존을 가리려는 화산(華山) 천하대회처럼, 이들은 아호사에서 3일 동안 진검 승부를 펼친다. 주요 주제는 “어떻게 공부하며 가르칠 것인가[教人之法]”이었다. 주희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두 형제는 ‘발명본심(發明本心)’을 주장했다. 전자를 ‘객관적 주지주의’, 후자를 ‘주관적 유심주의’라고도 한다. 육씨 형체 측 관전기에 따르면, 육씨 형제가 약간 우세를 점했다고 한다(『육구연집(陆九渊集)』). 이 기록은 편파적이므로 신뢰할 수 없다. 어쨌든, 이 모임은 후대 지속하는 성리학과 양명학을 대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진정한 학문적 논쟁의 개창’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 신유가를 살피려면, 이러한 역사적 연원에 대한 선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1975년, 웅십력의 재전(再傳) 제자들인, 왕방슝(王邦雄), 양주한(杨祖汉) 등이 민간 자본으로 철학 잡지를 창간하면서, 제호(題號)를 『아호』라고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아가 모우쫑산의 주저가 『심체(心體)와 성체(性體)』(황갑연 등 옮김, 소명출판)인 것도 의도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서명이 “성체와 심체”가 아니라, “심체와 성체”라는 것이 모우쫑산의 철학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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