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3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째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필부의 삶
나는 그저 한 필부(匹夫)일 뿐이다. 필부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신분이 낮고 보잘것없는 사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방점은 ‘보잘것없는’에 찍혀야 한다. 필부란 결국 대단한 신체적, 정신적 특질을 갖추지 못한 지극히 평범하고 가소로운 사내일 뿐이다. 혈기가 넘치던 시절에는 우리 모두 ‘대장부연(大丈夫然)’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고 사회물을 먹으면 대장부나 군자와 같은 기개와 생각들은 까맣게 잊혀진다. 대부분의 ‘우리’는 바람이 불면 일단 엎드리고, 비가 오면 처마지붕 밑으로 피한다. 굳이 ‘여세추이(與世推移)’라 비하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대부분 비루하고, 비겁하며, 잇속을 따를 뿐이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방외지사(方外志士)가 되어 고생길을 걷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계는 필부들의 하루하루로 구성된다
사회는, 국가는, 세계는 이런 필부들의 하루하루로 구성된다. 부연하자면, 그들의 삶과 노동을 통해 체제가 굴러가고, 토대가 다져진다. 우리가 ‘일상’ 혹은 ‘보통’이라고 부르는 그것의 총합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본질이다. 비록 우리 거의 전부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로 살다가 죽더라도,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우리는 영원하다. 1929년, 뤼시앵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를 중심으로 형성된 아날학파의 역사학은 이런 ‘필부들의 세계’에 대한 장대한 탐사이자 찬사다. 비록 그런 삶이 누군가의 눈에는 ‘개돼지’로 보이겠지만. 나는 그 누군가에게 명토박아 말하건대, ‘너는 그런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다.’
필부의 일상에 동의했기에 따르는 것
그렇게 우리는 묵묵히 살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는 하루하루의 고투 속에서 비루함을 감내하고 ‘저녁이 있는 삶’을 향해 집으로 간다. 만약, 우리의 이런 ‘일상성’이 파괴된다면, 침범된다면, 단절된다면, 구속받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아마 그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너희들은 우리가 정한 대로 걷고, 살고, 먹고, 마시니까 새로 정한 규칙대로 걷고, 살고, 먹고 마실 것이다.’ 아하! 이걸 어쩌나. 우리가 따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데 동의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면, 혹은 그 동의를 억지로 강제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우리는 그런 자들을 확 물어버린다. 그저 필부일 뿐인 우리는 폼이 나지도 않는 데다가, 담대한 용기나 지략도 없기에, 그저 물어버린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를 자랑하던 초패왕 항우(項羽)가 우미인을 베고, 초조히 오강을 건너려 할 때, 사면에서 초나라노래(楚歌)를 부르던 자들이 바로 필부다.
새해 첫날의 참담함
오늘, 2025년 새해의 첫날에 우리는 참담할 뿐이다. 12월 3일에 시작된 ‘계엄사태’와 ‘탄핵정국’은 여전히 공전(空轉) 중이다. 세밑에는 무안에서 비행기 사고로 179명의 생때같은 목숨이 사라졌고, 경기는 바닥이며, 술자리는 침울하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던 윤석열의 내란음모는 팔수록 가관이다. 구체적인 내용이야 다 아시겠지만, 이 음모극은 한마디로 ‘해괴하다’. 그러니까 주정뱅이와 광인과 무당과 점쟁이와 요녀와 군인과 음모가와 롯데리아가 뒤섞인 이 광란의 소동을 대하는 우리는 참담할 뿐이다.
그 기괴함을 따진다면
이 음모극과 비견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을까? 우리 역사나 세계사를 뒤져보아도 그 전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기괴함으로 따진다면, 러시아혁명의 도화선이 된 라스푸틴 정도가 될까. 한때 황태자의 혈우병을 치료한 신비한 능력으로 국정을 좌우했던 라스푸틴은 죽어서 병에 담긴 거대한 신체 일부(그 길이로 기억되는)와 자신의 죽음이 로마노프왕조의 최후를 재촉할 것이라는 예언으로 남았다. 우리 역사로 따진다면, 연산군과 장녹수, 광해군과 김개시, 윤원형과 정난정 정도가 될까. 윤석열과 김건희는 후대 역사에 길이길이 암군(暗君)과 요부(妖婦)로 남을 것이다.
유불리가 정해질 때까지 무임승차?
지난 세밑에 만난 손님들과 친구들의 반응은 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들 필부들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불안과 분노, 그리고 혼란의 신속한 종식이다. 탄핵 이전에 체포, 구속, 수사가 당연하다는 것. 그래서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내란죄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글을 쓰는 시점에서 윤석열은 관저에 숨어 있다) 이런 일반적인 반응들과 다르게, 오피니언 리더급의 모임(어쩌다 과거의 인연으로 엮인)들에선 적극적인 표현들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평소 시시콜콜히 여당이 어쩌고, 야당이 어쩌고 하던 사람들이 공히 입을 봉한 채, 사태의 추이를 살펴본다. 일체 입장을 내놓지 않고, 상황의 유불리가 정해질 때까지 지켜보겠다는 심사들. 골프와 자동차와 주식과 부동산에 미친 분들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아, 물론 환율이 오르고, 주가가 추락해서 성질이야 나지만) 다는 아니지만, 나는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단어가 ‘무임승차’라는 말이다. 그래서 말하고 싶은데 ‘이 인간들아! 민주공화국버스를 타려면 요금을 내라고’.
황후 민비와 무당 진령군
구한말, 매천 황현(1855~1910)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이라는 일기를 남기고 경술국치(庚戌國恥)에 항의하여 절명하였다. 그의 일기는 조선왕조의 최후에 얽힌 소문과 사실을 소상히 전해준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명성황후)는 충주로 피난했다가, 무당 진령군이 잡아준 날짜에 맞춰 환궁했다. 그녀는 이 무당을 위해 관왕묘를 지어 하사했고, 1884년 갑오정변의 혼란 속에서 이곳으로 피신했다. 두 번이나 자신을 살렸다는 이 무당에게 막대한 부와 권세가 집중되는 것이 당연했고, 진령군은 궁에서 굿판을 벌이며 민비(명성황후)의 권세가 영원하기를 빌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1년 후인 1885년 10월에 ‘여우사냥’이라는 한밤의 칼부림으로 그녀는 궁에서 암살되었고, 15년 후 조선은 망했다.
비록 나는 매천과 같은 지사도, 대장부도, 군자도 아니지만, 새해 아침에 다짐한다. 이 광란의 소동은 신속히 종식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 가소로운 필부로서 겁많은 자의 용기를 내어 한 손 거들기로 다짐하자. 거리로 나갈 형편이 아니라면, 벽을 보고서라도 소리를 내보자. ‘민주주의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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