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6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째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전체론적 사상체계
꽤 많은 분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한때 맑스와 레닌의 사상을 추종하던 열혈 분자였다. 저 80년대에 뭔가 세상을 바꾸고 말겠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학생치고, 그러지 않았던 사람이 몇이 있겠는가. 그때 나는 유물론자(지금도 그렇다)였고, 사회주의자(지금은 아니다)를 자처했다. 그들의 저작 중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뭐니뭐니해도 『자본론』과 『공산당선언』이 대표적일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저서인 『자본론』의 1권은 꽤 여러 번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문제는 내가 머리가 나빠서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십수 년 전에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임승수, 시대의 창, 2008)이라는 책이 출간됐을 때, 나만 자괴감을 느낀 것은 아니지 않았을까. 원숭이만도 못한 머리라니!
하지만 정작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저작은 엥겔스가 약관 스물넷에 쓴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1845)였다. 그는 산업혁명의 절정기에 들어선 영국 노동자계급이 겪고 있던 처절한 고난과 비참을 정면에서 고발한다. 80년대의 나에게 이 책은 당대의 한국 민중들이 맞닥뜨린 가혹한 현실을 오버랩시키면서 연대와 행동을 촉구하는 발화제 같은 것이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에 열광하고, 고민했을까?(불과 수년 후에 현실의 사회주의체제는 말 그대로 폭망(?)했는데) 그것은 ‘과학적 사회주의’가 단지 하나의 ‘비판이론’이 아니라 가장 유력한 ‘전체론적 사상체계’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역사와 정치, 경제와 사회, 심지어 과학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창이었다.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를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체제의 속성을 파악하고 극복하기 위한 시도를 멈출 수 없으며, ‘과학적 사회주의’는 일종의 잊혀진 비밀서고라 할 수 있다.
왜 비용이 더 드는데, 증기력이 수력을 대체했는가
오늘 소개하는 스웨덴의 생태학자 안드레아스 말름은 분명한 사회주의를 넘어서 무려 공산주의자(!)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아마도 『공산당선언』이나 『무엇을 할 것인가?』를 탐독하지 않았을까? 정말 유니크한 전작 『화석자본』(부제: 증기력의 발흥과 지구온난화의 기원, 두 번째 테제, 2023, 원서는 2016년에 출간)에서 그는 산업혁명기 증기기관의 선택 과정을 정밀하게 논증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수력을 이용한 수차보다 증기력을 이용한 증기기관의 생산력이 월등하기에 자연스럽게 대체되면서 산업혁명이 본격화된다’는 가정은 틀렸다는 게 그의 논증이다. 증기기관이 대세가 되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도 생산력으로서의 수차가 우월한 위치였다. 그럼에도 왜 자본가들이 증기기관을 선호하게 되었는가? 왜 비용이 더 드는데도 증기력이 수력을 대체했는가? 말름이 보기에 생산관계상의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자본가계급의 의식적인 선택이 동인(動因)이었다.
화석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이행과정은?
그렇다면, 150여 년이 흘러, 지금 ‘화석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이행과정은 어떠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볼 수 있는 저작이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마농지, 2021)이다. 왜인지 언급을 피하게 되는(주류 언론이건, 일상적인 대화에서건) 코로나 시기(2020~2021년 즈음)를 떠올려보자. 한창 위기가 깊어질 국면 속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좋았던 것은 오랜만에 보는 맑은 공기와 푸른 하늘이었다. 항공여행이 금지되고 봉쇄령이 일상화되면서 화석연료의 사용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정확히 계량화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5~10%의 저감이 이루어졌고, 평소라면 자동차를 만들었을 공장은 셧다운되거나, 강제로 산소호흡기와 같은 필수품을 생산해야 했다. 평소라면 자본가계급의 놀이터였을 국가는 단호하게 ‘임박한 파국’에 맞선 유일한 파수꾼이었다. 생각해보면, 2009년 이른바 ‘금융위기’ 당시에 국가는 서슴없이 은행을 국유화했고, 거슬러 보면 1940년대의 2차대전기,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과 영국에서 실시된 것은 배급제(식량과 연료와 필수 자원들)였다.
기후비상사태를 임박한 파국으로 본다면
그러니까, 말름은 코로나 시기의 국가를 보면서 ‘기후위기’ 혹은 ‘기후비상사태’를 임박한 파국으로 보고 유일한 대안으로서 ‘국가의 의식적인 선택을 통한 전면적인 강제이행’ 외에는 답이 없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그의 생각은 알게 모르게 ‘기후위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 속에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여기에는 전사(前事)가 있다. 1917년 2월혁명 이후 자유주의 케렌스키 정부가 헤매고 있을 때, 레닌은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팜플렛을 쓴다. 여기서 그가 언급한 것이 ‘전시 공산주의’(War Communism)였다. 그러니까, 어떤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부르조아국가를 대체하고 사회주의로의 강제이행을 시작하는 것. 어떤 논쟁도, 이견도 허락하지 않고 모든 인력과 자원을 단 하나의 목표에 쏟아부을 것. 결국 10월 혁명에서 내전기에 이르기까지 독일과의 강화(사실상 매국적인)를 받아들이고, 한때의 동지였던 멘세비키를 숙청한 볼세비키혁명이 완수되었다.
국가의 의식적 선택을 통한 전면적인 강제이행?
이런 그의 생각은 대단히 양가(兩價)적인 느낌을 들게 한다. 현실적으로 아무리 위기라고, 파국이라고, 시간이 없다고, 더 이상 허송세월한다면 만회할 기회가 없다고 떠들어보아도 변하지 않는 상황들. 여전히 공고한 ‘화석자본’의 시대를 끝내기 위한 유일한 길이 ‘국가의 의식적인 선택을 통한 전면적인 강제이행’ 외에는 없지 않을까? 반면, 이러한 사고방식이 일종의 ‘전체론적 사상체계’이며, 세계의 탈탄소화와 인류의 현재 기술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존재하는 현실을 무시하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 아닐까?라는 비판 역시 가능하다.
현재의 세계는 이 두 가지 방향 중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인류의 미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지구의 평균온도를 적어도 2도 증가 내에서 맞추기 위해 각 국가가 내세우는 모래시계의 모래알들은 얼마큼 남아있는가?라고 물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기후위기’가 대단히 원인분산적이며, 영향 역시 불균등하게 나타나는 문제이기 때문에 시간에 쫓긴 결정적인 한 방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복합적인 대안을 택해야 하는가? 맑스나 레닌이 현존한다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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